<2019, 제18회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 에서
춘설春雪
이현승
오랜 벗의 부친상 사십구재
어른이 돌아가시던 날
시계 5미터 안팎을 가로막던
거대한 눈보라처럼
깊어가는 저녁의 어둠 속
중유中有에 머물듯 창에 매달린 눈들
창 이쪽엔 눈물이 어린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벗은 그저 슬쩍 웃을 뿐인데
젊은 아들의 웃음 위에 겹쳐지는
익숙한 표정은 누구의 것인가
-전문,『아이스크림과 늑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삶과 죽음을 유랑하는 매듭의 감각들(발췌)_ 김정배/ 문학평론가
프리기아에는 왕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의 행동은 제멋대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림피아산 정상에는 그들을 위한 신들이 존재했다. 신들은 프리기아인들에게 만약 소달구지를 끌고 제일 먼저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왕관을 씌울 것을 신탁으로 남겼다. 마침 고르디우스라는 농부가 소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맨 처음 성문을 통과했다. 그는 프리기아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마가목 껍질로 꼬아 만든 동아줄로 고르디움 신전의 한 기둥에 수레를 묶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기아 사람들은 환호하며 그에게 몰려들었고, 평범했던 농부 고르디우스는 엉겁결에 프리기아의 왕이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시오노 나나미, 『그리스인 이야기 3』, 이경덕 옮김, 살림, 278쪽 참조)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후일담은 프리기아 사람들이 고르디우스가 몰고 온 수레를 옮기기 위해 그 매듭을 풀려고 했으나, 죽어도 풀리지 않는다는 난제로 연결된다. 기억할 만한 부분은 프리기아의 왕이 된 고르디우스조차도 자신이 맨 매듭을 끝내 풀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고르디우스의 아들인 미다스는 매듭과 함께 묶인 소를 신들의 재물로 바치기로 결정한다. 이후 그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진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소문은 이내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귀에 닿는다. 알렉사드로스는 고르디움 신전에 묶인 그 매듭을 직접 마주한 뒤 검을 빼 들어 두 동강 낸다.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인더스강까지 진격하고 아시아를 재패한다.
이 그리스 신화에서 우리가 호기심을 가질 만한 대목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검을 꺼내어 매듭을 잘라버린 알렉산드로스의 용기이다. 또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르디움 신전에 매듭을 묶었던 고르디우스의 알 수 없는 선험적 지평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큰 호기심을 유발한다. 고르디우스는 과연 성문을 통과하고 시내로 들어오는 동안 자신이 프리기아 왕이 될 것이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그는 왜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고르디움 신전 기둥에 자신조차 풀 수 없는 매듭을 묶게 된 것일까. 다소 공허하고 불편한 이 의문의 과정에서 우리는 마치 죽음이 삶(고르디움 신전)의 기둥에 묶인 매듭이라는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범박하게 다시 정의하자면 고르디우스가 마가목 껍질로 묶은 매듭은 삶의 기둥에 묶인 인간의 죽음 그 자체이다. 그 죽음은 태초 매듭을 묶었던 고르디우스조차도 풀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이자 불확정적인 영역이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재기발랄하고도 결단력 있는 용기가 그 죽음의 매듭을 끊어버렸다고 해도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일찍이 하이데거는 인간에 대해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라고 규정한 바 있다(소광희, 『하이데거,「존재와 시간」강의』, 문예출판사, 2004, 153쪽). 인간은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죽음 앞에 매듭지어진 유한한 존재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 삶의 기둥에 묶인 죽음의 매듭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며 확실하고 무규정적이면서, 인간은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시시각각 현존한다.(p.229-231.)
인간에게 죽음은 매우 일상적인 사태이면서, 그 일상성으로 인해 죽음은 오히려 삶 속에 가장 무감각하게 포착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은 끝없는 자기에의 물음과 낯섦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일상적 삶에 내재한 죽음의 감각을 매번 새롭게 받아들이고 인식한다. 이러한 자기에의 물음은 시인에게 죽음에 대한 자기의식으로 박제된다. 여기에서 자기의식이란 '가름'의 의미를 지닌다. 자기의식은 '나'와 '나 아닌 다른 것'이 불연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을 때 발생한다. 일찍이 헤겔이 타자성(otherness) 없이는 주체성도 확보할 수 없다고 분석했듯이, 내가 '나'를 긍정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아닌 타자를 나로부터 구분할 때 가능하다. 더 나아가 나로부터 구분된 타자는 무수히 많은 나로 확장한 '우리'가 된다.
이현승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 속에 실재하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에게 있어 죽은 사람의 얼굴은 마치 고르디우스가 묶어놓은 매듭처럼 그 실마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현승은 사람의 얼굴을 통해 죽음이라는 매듭의 실마리를 찾는다. 다시 말하자면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 속에서 죽은 타자의 모습이 현현하고 있음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이는 마치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강산무진』, 문학동네, 2006.))에서 딸과 죽은 아내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딸의 얼굴에서 죽은 아내를 발견하게 되는 모습과 흡사하다. 소설에서도 죽은 아내는 딸의 얼굴과 몸짓을 통해 되살아난다. 소설 속 주인공은 딸의 삶 속에서 아내의 죽음이 현현되는 것을 무척 난감해하지만, 그 감정이야말로 삶이 죽음에 늘 포섭되어 있음을 확인시킨다.
이현승의 시 「춘설」에서는 지금껏 살면서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고백으로 시적 화자는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다. 그러나 그 고백은 김훈의 소설 「화장」과 마찬가지로 이내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곧바로 '우리'라는 집합체가 되어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 집합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얼굴이다. 레비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얼굴은 보면서 보이는 겹 시선의 장소이다. 얼굴은 타자에 의해서만 확인된다는 점에서 죽음의 특질과 닮아 있다. 다시 말해, 얼굴은 일종의 영혼이며, 타자와 나를 잇는 장소로서의 집합체이다. 이로 인해 "얼굴은 '내재적 인간'의 얼굴이고 죽음 후에도 사는 얼굴"(자크 오몽, 김호영 옮김, 『영화 속의 얼굴』, 마음산책, 24-25쪽)이 되기도 한다. 「춘설」이라는 제목이 이목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춘설'은 말 그대로 봄에 내리는 눈을 의미한다. 시적 화자가 지금껏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고백은 일차적으로 '나'와 '타자'을 구분 짓는 의식이지만, 봄에 눈이 땅에 쌓이지 않고 스미듯, 죽은 자의 얼굴은 산 자의 얼굴에 스며들어 서로를 포옹한다.(p.232-234.)
* 심사: 편집위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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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2019-9월호 <제18회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에서
* 김정배/ 1977년 전북 진안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재 원광대학교 융합교양대학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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