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사 포커스/ 이메일 대담>
'시인'이라는 이름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
정숙자
1. 새해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걸어갈 때는 길가의 돌멩이, 풀꽃, 먼 산 등이 제 모습 그대로 눈에 들어오지만, 차를 타고 달리면 무엇 하나 제대로 구분할 수가 없게 되지요. 혼합된 색과 선으로 휙휙 미끄러지며 시간 밖으로 빠져나갈 뿐입니다. 현대의 한국인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요? 뭔지 모르게 숨 가쁘고, 허허롭고 종잡을 수 없는 바쁨 속에서…. 하지만 그런 중에도 초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건 누구나 내면에 방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우야 물론 '시'라는 구심점이 푯대이지요. 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는 모두가 거기 응집되니까요. 그런데 그에 따른 내면 풍경이란 근황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잔물결인 까닭에 늘 그날이 그날입니다. '평온' 정도로 해석하고 싶군요.
2. 아 네, 그렇다면 도대체 시란 무엇일까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군요. 그것은 마치 인간에게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전자와 등가선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얼핏 들어요. 하지만 그런 대답은 허무한 답변이 되겠지요. '시 이퀄 삶'이라는 건 시인이면 누구나 같은 패턴일 테니까요. 좀 더 미분하자면 저의 경우 '정화'라는 정의에 변함이 없습니다. 희로애락에서 빚어지는 엔트로피들을 시-작품을 통해 정화/순화시키며 승화시키기도 하거든요. 그 과정에서 자기 발견, 자아 확인, 이성의 확장까지를 가능케 하는…, 정녕 그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식이죠. 육신을 제하더라도 남는 것, 그것이 있어야 나도 있다, 뭐 그런 것인데, 육신을 제하더라도 남는 것. 그것이 저에게는 시라고 여겨집니다.
3. 시인으로 살면서 시에 대한 깨달음 같은 건 없었나요?
왜 없겠어요? 시 자체가 가져다주는 건 물론이고, 시인세계에서 참고 겪어야 하는 게 한두 번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용운 시인이 말했듯이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더군요. 변증법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과정들을 경험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의지를 만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외부에서 오는 고난이 없으면 무엇으로 자기 자신을 담금질할 수 있겠어요? 진리는 모순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모순을 눈여겨보면 매번 그 속에 신의 등불이 걸려 있었어요. 그러나 그걸 깨닫기까지는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가고, 이렇게 머리가 세고…. 아참, 시에 대해 분명한 깨달음 한 가지는 '시를 쉽게 생각하지 말자, 게으르지 말자'는 것입니다. 첫 행부터 끝 행까지 시는 저에게 경외의 대상이며 구원의 손입니다. 저는 절대로 시와 함께 걷는 사람이 아니며, 시를 향해 기도하는 사람일 뿐이다, 라는 그 깨달음 말입니다. 그가 시를 어떻게 여기고 썼는지는 그의 시를 읽으면 대번에 드러납니다. 시는 스위스 손목시계보다도 더 정교한 톱니들을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간을 일깨우고 또 새로운 과거까지를 만들어냅니다.
4.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기준이 있을까요?
좋은 시의 기준이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러므로 좋은 시의 잣대란 종잡을 수 없을뿐더러 스펙트럼 또한 무척 넓습니다. 왜냐하면 사조에 따라 관주가 매겨지기도 하고,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역시 가장 산뜻한 작품은 전인미답의 지평을 열어 보이는 시이겠지요. 흔히 봐오던 내용이나 문투가 아닌, 그러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기교와 스토리가 알맞게 구사되어 새로우면서도 마음 깊숙이 찔리는 것이 있는, 그런 시! 아니, 좋은 시보다 안 좋은 시를 논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안 좋은 시의 첫 번째는 기시감입니다. 기시감! 아무리 뒤집어 봐도 그건 참 큰 문제입니다.
5. 앞으로의 계획은?
계획으로 실현 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만 별일 없이 사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 시간이 남아돌지 않게 사는 것. 조용히, 외로이, 꿋꿋이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것. '시인'이라는 이름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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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사』2019년 3-4월호 <시사사 포커스 / 이메일 대담> 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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