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론티온
T. S. 엘리엇(1888-1965, 77세)
자, 나는 지금 메마른 계절에 비를 기다리며
아이가 글 읽어 주는 소리에 귀를 맡기고 있는 늙은이라오.
나는 열기熱氣로 뒤덮인 지옥의 문턱에서 싸워 본 적도 없고,
더운 비를 맞으며 싸워 본 적도 없다오.
소금기 머금은 늪지의 물에 무릎까지 잠겨 날벌레에게 뜯긴 채
단검을 휘두르며 싸워 본 적도 없다오.
내가 머무는 곳은 퇴락한 집이라오.
그리고 창턱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집 주인 유태인은
앤트워프의 싸구려 술집에서 잉태된 다음,
브뤼셀에서 물집이 잡히고, 런던에서 딱지가 지고 벗겨진 그런 친구라오.
밤에는 염소가 집 위쪽 들판에서 기침을 한다오,
바위와 이끼와 돌나물과 쇠붙이와 배설물로 뒤덮인 곳에서.
여인네가 부엌을 치우면 차를 준비하고 있다오,
재채기를 하며 저녁에, 투정을 부리듯 막힌 수쳇구멍을 쑤시며.
나는 늙은이,
바람이 몰아치는 공터 한가운데의 멍청한 머리라오.
표적은 기적으로 여겨진다오.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말 안의 말, 말을 할 수 없는 말,
어둠의 강보에 싸여 있는 말. 세월의 유년기에
호랑이 예수께서 오셨다오.
타락한 오월에, 산수유나무와 밤나무와 꽃이 만발한 유다나무의 계절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먹히고 나뉘고 마셔지기 위해. 부드러운 손길의
실베로 씨, 리모쥬에서
밤새 옆방에 머물며 서성이던 그에 의해.
티티안의 그림 사이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하카가와에 의해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옮기던
드 톤키스트 부인에 의해. 그리고 한 손을 문에 댄 채
현관에서 몸을 돌리던 폰 쿨프 양에 의해. 직조기의 텅 빈 북이
바람을 짜고 있다오. 나는 영혼이 없는 늙은이,
바람 부는 언덕 아래
바람막이 없는 허술한 집에 머무는 늙은이라오.
그와 같은 앎을 얻었다고 해서 어떤 용서가 있겠소? 자, 생각해 보시오,
역사는 수없이 많은 교활한 통로와 술책을 감춘 회랑과
출구를 갖추고 있으며, 야망을 속삭여 우리를 속이고
허영으로써 우리를 이끈다오. 자, 생각해 보시오,
그녀는 우리의 주의가 산만할 때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고
무엇을 주든 나긋나긋한 어조의 혼란스런 말에 담아 주기에
받으면서도 우리는 더욱 갈증을 느낀다오. 주어도 너무 늦게
그것도 믿을 수 없는 것을, 또 믿는다 해도 다만
기억 속에서, 이미 열정이 식은 상태에서만 믿는 것을 준다오. 주어도 너무 이르게,
받아 쥘 수 없는 연약한 손에, 그것도 없어도 되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거절했다가는 두려워해야 할 때까지 줄 뿐이라오. 생각해 보시오.
두려움도 용기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오. 우리네 인간의 영웅심이
터무니없는 악행들을 낳고 있고, 파렴치한 범죄 행위가
우리에게 미덕을 강요하고 있다오.
이 눈물은 분노의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오.
새해엔 호랑이가 몸을 솟구쳐,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시오,
세든 집에서 내 몸이 굳어가고 있는 지금,
우린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소.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시오,
내가 아무런 목적 없이 이렇게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오.
나는 과거에 기대어 엉터리 예언을 하는 악마들의
부추김을 받아 이러는 것도 아니라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솔직하게 당신과 대면하고 싶소.
당신의 마음 가까이에 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제거됨으로써,
두려워하는 가운데 아름다움을, 묻는 일에 열중하는 가운데 두려움도 잃었다오.
나는 열정도 잃었다오. 그걸 간직한 필요가 있겠소?
무엇을 간직해도 타락하고 말 것인데 말이오.
나는 시각도, 후각도, 청각도, 미각도, 촉각도 다 잃었다오.
당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소.
천 가지 사소한 잔 생각들과 함께 이들 오감五感은
그것들의 차디찬 착란 상태가 베푸는 혜택을 연장하고,
감각이 싸늘하게 식었을 때, 자극적인 양념으로
세포막을 자극하며, 무수한 겨울에 비친
다양한 이미지를 배가하오. 거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작업을 중단할 것인가, 바구미는 제 일을
지체할 것인가. 조각난 원자로 분해되어,
두려움에 몸을 떠는 북극성좌의 궤도 바깥쪽에서 맴돌고 있는
드 바이아쉬, 프레스카, 케멀 부인, 벨 섬의 바람 센 협곡에서
바람에 내몰리다가, 또는 눈 속에 흰 깃털을 맡긴 채
케이프 혼 위를 내달리다가 멕시코 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갈매기.
무역풍에 휘몰려 졸음이 지배하는 구석으로
내몰리는 한 늙은이.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들,
메마른 계절에 메마른 두뇌 속을 떠도는 갖가지 상념들.
-전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 말과 말씀, 의혹과 믿음, 심판과 구원 사이*_ 엘리엇의 『게론티온』, 그리고 시대와 현실에 대한 시인의 위기의식(발췌)_ 장경렬 // (……) 이 시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이유를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늙은이"에게 독백을 이어가게 하는 주체는 30대 초반의 젊은 시인 엘리엇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 우발적인 상념들의 나열 같아 보이는 각각의 연聯들 사이에는 고도로 정교한 연결고리가 감지된다. 아울러, 각각의 상념들도 횡설수설과 다름없어 보이긴 하나, 여기에 담긴 시적 메시지를 해독하는 데 무리가 없을 만큼 내적 질서와 논리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게론티온(가상인물)의 독백을 따라가 보면 그는 결코 "멍청한 머리"나 "메마른 두뇌"의 소유자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이를 증명하는 예를 하나 들자면, 제5연에서 확인되는 역사와 인간 관계에 대한 게론티온의 관찰과 이해는 더할 수 없이 예민하고 심오하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 자신을 멍청하다 말하는 사람 가운데 진실로 멍청한 이는 없을 것이다. 진실로 멍청한 이는 자신이 멍청하다는 판단조차 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게론티온이 말하는 "멍청한 머리"나 "메마른 두뇌"는 전략적으로 동원된 표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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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청춘』2018-여름호 <영미시산책 ②>에서
* 장경렬/ 1953년 인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미국 오스틴 소재 텍사스대학교 영문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재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 비평집 『미로에서 길 찾기』『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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