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면嗜眠
이재훈
도로가 빙빙 돌고 앞이 안 보인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막힌다.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하여 주변을 빙빙 돈다.
맥주를 마시면 버스를 타지 못한다.
온몸에 서슬이 돋고 입술이 파래진다.
낭떠러지에 차가 굴러 떨어진다.
창자가 땅에 모두 쏟아지고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진다.
홀로 순댓국집에 들어간다.
남루한 옷을 입고 가면을 뒤집어쓴다.
방충망에 매미가 붙어 있다.
비바람이 불자 날개 껍질이 흩어진다.
지렁이는 아스팔트 위에서 몸이 찢겨진다.
도처에 칼과 도끼가 넘쳐난다.
새빨간 눈을 가진 들개가 무릎 위로 튀어 오른다.
독사가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가슴에 똬리를 튼다.
원하는 것은 땅에 없다.
마음에 가질 것은 경륜이 아니라 자유다.
길가에 핀 버들강아지를 꺾는디.
예쁘다고 매만지다가 잎을 뚝 잘라버린다.
식탁 화병에 꽂아 두고 오래 본다.
바람을 맞고 음식냄새를 맡고 분노를 듣는다.
침 흘리는 소리를 듣고 뉴스를 듣는다.
버들강아지는 시들어 죽는다.
병들어 죽은 줄만 알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혁명은 가을에서 시작된다.
-전문(p.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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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3-겨울(94)호 <신작시> 에서
* 이재훈李在勳/ 강원 영월 출생,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명왕성 되다』『벌레신화』『생물학적인 눈물』『돌이 천둥이다』, 저서『현대시와 허무의식』『딜레마의 시학』『부재의 수사학』『징후와 잉여』 『환상과 토포필리아』, 대담집『나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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