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 연구가
한명희
우리 아버지
거미줄 연구가였지
거미를 키운 적은 없어도
거미줄에 대해 박식했지
날벌레가 어떻게 거미줄에 걸려드는지
거미줄에 걸려든 날벌레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알려주셨지
아니 알려주고 싶어 하셨지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다 집 밖에 있었네
집은 너무 습하고 많이 어두웠다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는 요즘 그물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거미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
거미줄이 기본이라고 했지
큰 날벌레는 다 놓치고 마는
거미줄의 무기력을 얘기할 때
아버지의 목소리는 거미줄보다 희미했네
말년에 아버지는 탑에 대해 연구했지
아버지의 연구대로라면
아랫돌들은 윗돌의 하중을
견디고 있는 것이었지
돌탑이 아니라 쇠탑이나 나무탑이라고 해도
탑은 모두 마찬가지라고 했지
너무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지 마라
나는 그 말이 가장 듣기 싫었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저는 요즘 마천루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높은 빌딩일수록
첨단공법이 많이 들어가니까요
하중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겠어요 아버지
우리 아버지
요즘은 무엇을 연구하실까
무엇이든 아버지
제 걱정은 마세요
저는 아버지와 다르니까요
-전문(p. 16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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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3-겨울(94)호 <이 계절의 시인> 에서
* 한명희/ 1992년『시와시학』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꽃뱀』『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두 번 쓸쓸한 전화』『시집읽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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