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제18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너를 사랑한다
『초록 거미의 사랑』 중에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않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전문(p. 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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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5회 지용제 사화집 『어머니 범종소리』/ 2022. 9. 14. <옥천군· 옥천문화원· 지용회> 펴냄. (비매품)
* 강은교/ 함경남도 홍원군 출생, 1968년 『사상계』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허무집』『풀잎』『빈자 일기』『등불 하나가 걸어오네』『소리집』『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벽 속의 편지』『붉은 강』『어느 별 위에서의 하루』『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초록거미의 사랑』『네가 떠난 후 너를 얻었다』『바리연가집』『봄무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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