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기마자세/ 최금진

검지 정숙자 2022. 7. 17. 01:27

 

    기마자세

 

    최금진 

 

 

  오지 않는 말을 기다리는 겁니다

  말이 함께 데리고 나간 갈기 무성한 숲의 나무들과

  말똥처럼 따뜻하게 버려진 작은 오두막을 기다리는 겁니다

  말발굽이 돋아 터벅터벅 외양간으로 돌아가는 달

  그 고삐를 손에 쥐고 어제보다 더 먼 길을 걸어갔던 유목민들처럼

  허공의 하중을 버티며 조금씩 무너지는 겁니다

  조랑말 한 마리 있을 리 없는 방안을 둘러보며

  내가 나를 태우고 달릴 수 있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사람이 말답게 걷고 달리는 법을 달게 받는 겁니다

  어린 날 목말을 태워주던 아버지가 계셨다면

  가끔은 잠꼬대를 하며, 히히힝,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줄 텐데

  나의 죽마고우들은 모두

  딱딱한 나무의자처럼 늙고 병들어 하나둘 고향으로 모여듭니다

  싸움에서 패배하고 혼자 돌아온 말이 되는 겁니다

  무릎을 꺾고 자리에 엎드려

  커다란 어금니를 내보이며 헐떡헐떡 웃고 있는 겁니다

  내가 떠나보낸 말을 생각하는 겁니다

  무너진 울타리가 마지막까지 견뎌주던 안팎의 공허를

  이렇게 짊어져 보는 겁니다

  오지 않는 말을 기다리는 겁니다

  이 텅 빈 고삐를 쥐고 나를 어디에다 묶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겁니다

      -전문(p. 288)

   

   * 에스프리; 나의 시_최금진>에서 한 구절/ "시를 쓰기 위해선 감흥 없는 추억의 변두리 혹은 우중충한 거리라도 헤매야 한다" (p.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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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문학과 사람이 선정한 한국 유수의 시인들, 詩와 에스프리

      『내   2022. 6. 10. 초판 1쇄 <문학과 사람> 발행

   * 최금진/ 2001『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새들의 역사』『황금을 찾아서』『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산문집『나무위에 새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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