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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훈_시공간의 꽃 이미지 탐색(발췌)/ 벚꽃 나무 아래서 사과하다 : 김경미

벚꽃 나무 아래서 사과하다 김경미 활짝 핀 꽃 그늘 밑을 지나가다 문득 생각했지요. 내가 망쳤구나. 그의 이십대를··· 이토록 젊고 눈부실 그 사람 인생의 봄을 갑작스런 이별통보로 내가 엉망을 만들었구나.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그 젊음. 그 화창한 시간을 내가 그랬구나. 문득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때의 갑작스런 마음이 변화도 어쩔 수가 없었으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변명하면서 봄꽃 활짝 핀 그늘 밑에 잠시 멈춰서서 미안했다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 사과 전하려 직접 만날 생각은 영원히 없지만 그 사람 어느 날 활짝 핀 벚꽃 아래를 지나다 날 떠올리지 않고도 그냥 뭔갈 다 용서하는 기분이 되길 옛일 따윈 잊고 지금 참으로 단란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활짝 핀 청춘의 벚꽃 나무 아래를 지나며 그렇게 내 진..

새를 접으며 외 1편/ 한승희

새를 접으며 외 1편 한승희 종이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 빨갛게 피가 배어 나온다 단지, 스쳤을 뿐인데 몸에 고였던 눈물이 흘러나와 종이를 빨갛게 물들인다 너를 보내고 밤새 종이를 접었다 꽃을 접고 나비를 접고 새를 접어 허공으로 날렸다 새는 문턱을 넘어가지 못했다 옥상에서 벼랑에서 너에게 날아가는 새가 되고 싶어 문밖을 나서기도 했다가 다시 돌아와 종이를 접으며 살짝, 스쳤을 뿐인데 빨갛게 피가 배어 나온다 종이에 슬픔을 베이며 들켜버린 너에게로 가는 붉은 마음을 접는다 -전문(p. 26-27) ---------- 장마 지루한 비가 며칠째다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빗소리 흠뻑 둘러 빈대떡 하나 부친다 타닥타닥 탁- 탁 빈대떡이 노릇노릇 빗소리가 맞춤으로 익어간다 너 없이 빗소리만 지지..

가끔씩 나무는 새를 낳는다/ 한승희

가끔씩 나무는 새를 낳는다 한승희 부리를 가지고 있는 건 연둣빛밖에 없다 겨우내 실종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나무 속에서 연둣빛 부리를 드러내는, 그러나 아직은 어떤 하늘이 뛰어들지 알 수 없고 초봄 한때 모든 나무 속엔 지난가을 이후 모습을 감췄던 새들의 부리들이 연둣빛 노래를 꺼내려는 안간힘이 있다 그렇다면 새들은 지난가을 이후 모두 화석이 되었던 것일까 노래를 멈추고 나이테 속에 박힌 채 어두침침한 날들을 넘어왔단 말인가 끝내 가슴을 후벼파도 열리지 않는 나무들의 지난날 그 입구, 좀처럼 아무것도 새어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나무들의 한 쪽이 바람을 옮기려는 듯 우지끈 기우는 한때 봄의 나무 속엔 겨우내 노래를 담고 지낸 새 몇 마리 푸른 부리를 나이테 밖으로 내밀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유사..

한상훈_시공간의 꽃 이미지 탐색(발췌)/ 산벚꽃 나타날 때 : 황동규

中 산벚꽃 나타날 때 황동규 물오른 참나무 사이사이로 산벚꽃 나타날 때 더도 말고 전라북도 진안군 한 자락을 한나절 걷는다면 이 지상살이 원願 반쯤 푼 것으로 삼으리. 장수 물과 무주 물이 흘러와 소리 죽이며 서로 몸을 섞는 죽도 근처 아니면 조금 아래 댐의 키가 조금씩 불어나고 있는 용담 근처. 알맞게 데워진 공기 속에 새들이 몸 떨며 날고 길가엔 조팝꽃 하얀 정情 뿜어댈 때 그 건너 색깔 딱히 부르기 힘든 물오른 참나무들 사이사이 구름보다 더 하늘 구름 산벚꽃 구름! 그 찬란한 구름장들 여기저기 걸어놓고 그 휘장들을 들치고 한번 안으로 들어간다면. -전문- ▶시공간의 꽃 이미지 탐색 벚꽃(발췌) _한상훈/ 문학평론가 「진달래꽃」의 '영변에 약산'을 비롯해서 구체적 지명을 통해 향토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문학이 주는 선물(부분)/ 윤영훈

中 문학이 주는 선물(부분) 윤영훈/ 아동문학가 ·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즉, 문학인은 외로운 공간 속에서 시대의 선구자로서 고뇌하며, 남다른 창작의 열병을 앓아야 하는 것이다. 문학인은 반짝이는 언어의 광맥을 찾기 위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한다. 이렇게 숱한 인고 속에 탄생한 좋은 문학 작품이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많은 사람의 정서를 순화시켜 준다. 문학을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아는 것도 많아서 화제가 풍부하여 대인관계도 좋을 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다양하여 기발한 아이디어도 잘 생각해 낸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는 오늘날, AI가 대체할 수 없는 창의성은 문학 속에서 찾아야만 하기에 여전히 문학책을 읽어야 할 당위성은 존재하..

한 줄 노트 2024.02.21

돌멩이 외 1편/ 문효치

돌멩이 외 1편      문효치    저 내던져진 돌멩이에  별빛이 들어와 살고 있다   돌에 박혀 웃고 있다   돌이 구르는 대로 함께 구른다  돌이 발길에 차이면  함께 차여 여울에 빠진다   그 아름 오죽하랴  상처에서 금빛이 난다   우주를 떠나온 별빛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저 돌멩이 속에 들어왔다   돌멩이 싱글벙글 또 구른다    -전문(p. 50)      ------------------------    헤이, 막걸리    바람개비가 돌이간다   술병이 돌아간다  술이 돌아간다   바람개비가 돌 때  한 사내가 돌아간다   술은 돌아 돌아  어디로 흘러가는가   계곡물이 흘러간다  술이 흘러간다   한 사내가 흘러간다  세상의 심층  내장의 어느 계류   바람개비가 돌아갈 때  아, 나도..

말이 달린다/ 문효치

말이 달린다      문효치    내가 한 말이 달린다  나는 말 위에 타고 달린다  가속도가 붙는다  말은 내 생각과 다른 길로 달린다  말은 제 의지대로 달린다  나는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가 없다  말의 뜨거운 목덜미를  힘차게 부여잡고 달린다  말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른다  무언가에 부딪히고 또 부딪히고 하기 때문이다  내 머리도 그렇다  통증이 온몸을 뒤덮는다   그래도 또 말을 한다  말은 말이 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생존에 필수인 공기나 음식을 제외하면 말은 인간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다. 말의 기본적인 기능은 타인과의 소통이다. 나에게서 발화한 말은 타인에게 전달되는 순간 나만의 것이 아닌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된다. 이 시에서 말은 말..

일없다 외 2편/ 오탁번

일없다 외 2편 오탁번(1943-2023, 80세) 애련리 한치마을 큰 느티나무 앞 폐교에는 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고 새소리만 들리는 적막뿐이었다 오석烏石에 새긴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가 번개치듯 내 눈에 들어왔다 교실 세 칸에 작은 사택 다 주저앉은 숙직실과 좁은 운동장이 옛동무처럼 낯익었다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을 살려 '원서헌'遠西軒이라 이름짓고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을 잔다 먼 서녘, 원서는 종말이 아니라 새날의 시초라고 굳이 믿으면서 스무 해 되도록 이러구러 살고 있다 서울 친구들은 낙향해서 괜히 고생하는 내가 좀 그래 보이겠지만 수도가 터지고 난방이 잘 안 돼도 일없다 두더지가 잔디밭을 들쑤셔도 사람보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자주 와도 다 일없다 -전문(p. 19-20/ 『예술원보』66..

상희구/ 오탁번

상희구 오탁번(1943-2023, 80세) 궁핍과 절망뿐이던 1950년대 그 시절 대구 영남중학교 3학년 소년 하나이 학교를 더는 다니지 못하고 제적을 당하였다 신문팔이도 하고 행상도 하다가 대구소방서 사환으로 용히 들어갔다 똘똘한 소년이 꾀부리지 않고 일을 잘 하니 소방서 대원들 눈에 들어서 밥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소년은 중학교를 꼭 마칠 생각에 가까운 성광중학교를 찾아갔다 소년은 힘차게 말했다 3학년으로 꼭 넣어 주세요 소년의 말을 들은 콧수염 교장이 말했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 생떼를 쓰냐 제적을 당한 놈이 택도 없다 1학년을 다시 다니거라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은 소년은 울면서 소방서로 돌아왔다 소년의 울음소리에 소방서는 빅뱅 0.001초 전의 우주처럼 캄캄한 적막에 휩싸였다 ..

순간의 집/ 김영

순간의 집 김영 결집이라곤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바람의 그물코가 보인다 휘몰아치는 허공을 상량으로 올렸으니 이 집의 상량문上樑文엔 무너지는 비법이 담겨 있겠다 싱싱하거나 푸른 날것은 치즈 나이프의 절삭력을 닮은 모래 능선을 조심해야 한다 오늘의 메뉴는 치밀했던 오류 한 점 엄밀하게 재료를 가감하는 모래 주방에서는 어떤 요리도 겹꽃으로 피지 않는다 후식으로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종다리 울음소리를 넣어 휘저으면 귓바퀴가 구름에 닿는다 번뇌가 없는 뭉게구름은 속도도 없어 한 점 그늘이 귓등에 오래 정박한다 채근은 머리카락의 일 바람은 모래를 베고 꽃잠에 들었고 그늘의 옆구리를 찢고 발아하는 아지랑이는 첫걸음을 놓친다 길이라 고집했던 모든 길들이 다 지워지고 위쪽은 오로지 구름이고 아래쪽은 푹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