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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로즈의 계단 외 1편/ 데이지 김

펜로즈의 계단 외 1편 Daisy Kim 이것은 풀 수 없는 수학공식 오직 내려오기 위해 올라가며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순환의 방식이다 위태로운 아랫길은 목적지가 될 수 없어 뒤꿈치를 돌아보지 않는 갑과 가파른 미래를 무릎 삐걱거리도록 올라도 바닥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을의 공간 속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 ㄱ과 납작한 발아래를 내려가는 ㄴ은 공식을 구하지 못하고 눈높이가 다른 서로의 방향만 맴도는 관계다 뒤를 밟고 올라도 꼭대기는 없어 평면에만 머무는 계단의 관성 고단한 호흡이 엎드린 계단을 물끄러미 착시한다 위와 아래를 경계 짓는 불평등의 처세 계단은 더 이상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는 통로가 아니다 방식은 달라도 속내를 감춘 내면의 밑바탕, 부조리 없이 쳇바퀴를 굴리며 등에 짊어진 가족의 무..

사진신부를 기리다/ 데이지 김

사진신부를 기리다 Daisy Kim 흰 옷고름으로 앞섶을 동여맨 처녀들이 날카로운 파도의 발톱을 타고 거친 생계의 물고개를 건너왔다 홑겹 치맛자락을 검정 탄식으로 여민 혼인 예식 항구의 모래밭에서 야자나무 열매는 조롱조롱 잔치처럼 벙글었다 이름도 나라도 빼앗긴 사진 속 신랑은 빈 냄비처럼 달아오른 아열대의 기후 속에서 갈라진 구릿빛 맨발로 바닥을 헤치며 끝없는 설탕섬을 메우고 있었다 피맺힌 사탕수수 밭에 밤이 오면 어린 신부는 해진 작업복에 질긴 삶 한 겹을 덧댄 삯바느질로 독립자금을 모았다 흙먼지를 껴입은 대낮 노동의 고된 지문이 닳아갔다 서툰 이국어를 목구멍으로 삼키고 끙끙 신음 소리 같은 우리말로 아리랑 고개를 꺼억꺼억 넘기면 목메인 세마치장단이 목놓아 울 곳을 찾아 웅크린 해변으로 와 누웠다 애국..

낙타의 문장/ 이학성

낙타의 문장 이학성 생각이 막힐 땐 낙타를 업고서 사막을 건넌다고 상상하지. 검푸른 하늘에 박힌 뭇별들을 거룩한 안내자 삼아 닷새째 나가고 있으나, 말문이 트이기 전까진 낙타를 내려놓지 않으리라 다짐하지. 꼬박 낙타를 떠메고서 사구를 넘자니 발목이 모래무덤에 빠지고, 위안을 구실로 단조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지만, 업힌 낙타는 마치 몹쓸 병이라도 도진 것처럼 생기를 잃고 혼곤한 잠에 빠져 있어. 그러니 어서 마을로 낙타를 데려가야 해! 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그래서라 상상을 서두르지. 아무리 병든 낙타라지만 순한 새끼양보다 가벼울 리 있을까. 대관절 낙타를 업는 게 말이 되냐며 누구든 나서서 뜯어말릴 만도 한데 아직 그러는 이는 없어. 온종일 걸어도 낙타가 무겁게 침묵하는 까닭과 일평생 떠맡아 ..

시심전심-카톡방 대담(한마디)/ 차창룡 : 함성호

시심전심 카톡방 대담(한마디) (前略)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차창룡(동명) : 함성호 함성호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동명이 더 잘 설명하실 수 있을 것도 같아서 이 질문엔 제가 어떻게 모르는지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차창룡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차창룡 불교계에 있다 보니 선생님께서 쓰신 불교적인 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첫 번째 시집 『56억 7천만 년의 고독』이나 다섯 번째 시집 『타지 않는 혀』가 눈에 띕니다. 전자는 먼 훗날 우리를 구원할 미래의 부처님에 대한 전설이고, 후자는 일찍이 동아시아에 불교를 전한 전법승에 대한 전설입니다. 이 불교적인 전설과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방향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요? 함성호 어쨌든 잘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저는 평생을 갖..

대담 2024.03.02

나무 왕생/ 유소정

나무 왕생 유소정 향내 가득한 여름날 밤 불을 피워 놓고 사라수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까지 옥소리를 내며, 북을 쳐, 징을 쳐 주루루룩 발맞추어 함께 춤을 추자 호乎, 얼마나 대단한가! 때맞추어 소리를 함은 길하게 하라, 길하게 하라, 길하게 하라! "나는 잊어버리고 꽃을 가져오지 않았다." -전문(p. 96)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유소정/ 2018년 『현대향가』로 작품 활동 시작, 현재 LREC교육·연구 디렉터 & MUSIC 테라피스트

운명의 경사/ 함성호

운명의 경사 함성호 사람들이 안개비를 밀어내며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그처럼 꽃이 피었다 그 너머에 옥빛바다는 어딘가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슬픔이 인간의 조건이라면 우리는 모두 운명의 경사에 놓인 기울어진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다 시든 꽃들은 계절의 다음을 모르고 불을 켠 집어등들이 수평선을 지우고 있다 지난날 우리 둘이 즐거웠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걱정과 근심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공중의 솔개처럼, 뛰어오르는 숭어처럼 운명의 경사로, 배꽃 같은 파도가 밀려들어오는 하류로, 어떤 가난도 철없음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믿는다 수면 위로 드리운 팽나무 어지러운 가지에 사랑인지 증오인지 모르고 달려드는 물고기 떼 세상은 눈물로 된 바다를 휘저어 만들었대 인간이라는 장애..

주목받지 못해서 감사하다/ 차창룡

주목받지 못해서 감사하다 차창룡(동명) 유튜브를 시작했으나 봐주는 사람이 없다 야속하기도 했으나 생각해보니 감사하다 주목받는 사람은 얼마나 바쁜가 바쁘지 않아서 나는 날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뒷산에 소풍 간다 경쟁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침밥 먹고 뒷산에 소풍 가는 사람 몇이나 되나 그것도 매일 소나무가 꿩의 입을 빌려 부르는 노래 듣는 이 얼마나 되나 해당화가 피었다 지면서 살짝 눈을 흘길 뿐 마스크를 내리고 오던 사람이 나를 보더니 재빨리 마스크를 올릴 뿐 알아보는 이도 없고 말 걸어오는 이도 없어서일까 까치들이 동무하자고 가까이 온다 다람쥐가 나무둥치인 줄 알고 내 발 위로 지나간다 그렇게 하루가 심심하다 새소리가 청아하면 하늘에선 구름이 할 일이 없어진다 심심한 김에 참선이나 하자 주목받지 않..

계간『시로여는세상』2022-봄(81)호_재창간사(부분)/ 김용옥

中 차 한 방울이 기억의 거대한 건조물로(부분) 김용옥/ 시인, 본지 발행인 책상 위에 두 권의 책이 놓여 있다. 2022년 『시로여는세상』 봄호 창간호와 2021년 겨울호가 그것이다. 두 책 사이에는 긴장과 난맥이 얽혀있는 2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내재한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이 그동안 많은 문예지의 경우 하나의 유기체로 활발한 대사운동 끝에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면서 크게 진화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했다. 『시로여는세상』이 문학의 자장 안에서 2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은 지원과 애정을 주신 모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이제 발간 20년을 지나 ··· 다시 한 번 창간사를 복기하며, 앞으로도 『시로여는세상』은 모든 생명체가..

권두언 2024.03.01

내 시에서 불교 냄새가 난다고?/ 윤정구

내 시에서 불교 냄새가 난다고? 윤정구 오빠 시에서는 부처님 냄새가 난다고 수녀동생 생각해서라도 하느님 이야기를 쓰라는 누이야 시의 나라에서는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이 같이 노신다 -전문(p. 77)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윤정구/ 경기 평택 출생, 199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햇빛의 길을 보았니』『쥐똥나무가 좋아졌다』『사과 속의 달빛 여우』『한 뼘이라는 적멸』, 시선집『봄 여름 가을 겨울, 일편단심』, 산문집『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 동인

풍요(風謠)/ 이영신

풍요風謠 이영신 來如來如來如(래여래여래여) 오는구나 오는구나 오는구나 來如哀反多羅(래여애반다라) 오는구나 서럽구나 哀反多矣徒良(애반다의도량) 서럽기도 하구나 우리들이여 功德修叱如良來如(공덕수질여량래여) 공덕 닦으러 오는구나* 운문산 풀무치 상운암엔 늙은 비구스님 공양주라네 저 산 아래에서 지친 이들이 허덕이며 오르고 샘물 한 잔으로 입가심하고 나면 열무김치 감자전 밥 한 상 수북하게 차려 낸다네 쌀밥 한 수저 듬뿍 퍼서 입에 넣는 모습 보면 "우리 부처님네 밥 잘 드시네" 헤벌쭉 웃으시네 암자 근처까지 곧잘 내려오는 바람 구름 떼는 잘 여물다가 쭈그러진 머리통을 살살 간질여 주네 낮달도 슬며시 끼어들어 밥 한술 얻어먹고 싶어지네 -전문(p. 58) * 風謠 -------------------- * 향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