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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협) 지난 2년 동안 고마웠습니다/ 유자효(회장)

에서 지난 2년 동안 고마웠습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 회장 존경하는 한국시인협회 회원 여러분, 부족함이 많은 제가 여러분들의 사랑과 배려 덕분으로 임기를 마무리해가고 있어 고맙습니다. 코로나 통제가 풀리면서 시작된 제 임기는 억눌린 욕구들이 분출된 2년이었습니다. 한국시협의 제대로 된 기능은 회원들이 좋은 작품을 쓰도록 지원하는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과시적인 행사를 줄이고, 회원들이 보다 고독해질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잘하는 시협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의 특수성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일들을 벌여 회원들을 번거롭게 해드리지나 않았는지 송구스럽습니다. 지난 해 3월 프랑스시인협회와 맺은 상호교류협력 협정에 따라 지난 9개월 동안 48명의 회원 시가 프랑스와..

권두언 2024.02.15

파도/ 임후

파도 임후 배를 타고 있었는데 밤이었어요 친구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지금 선실 창밖 풍경이 너무 예쁘다고 지금 당장 봐야 한다고 소리쳤어요 친구들이랑 허겁지 창문 앞으로 달려갔는데 어두운 밤에 파도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고 진짜 너무너무 예뻐서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환하게 빛났어요 그리고 파도가 엄청 세게 쳤는데 풍경은 너무 예쁘고 크게 요동치는 파도에 배가 위아래로 들썩이는 게 너무 재밌어서 행복해했던 기억이 나요 행복해하고 행복해하다가 어느새 파도가 잦아드는 것 같았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들은 모두 사라지고 깜깜한 암흑 속에 저 홀로 떠가고 있었어요 해몽을 해 주실 수 있나요 해몽을 받고 싶어요 이미 백 년이 지난 꿈이라도 괜찮다면요 -전문- 59 시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기억하는 ..

고삐/ 이윤정

고삐 이윤정 순종도 오래 견디면 브레이크가 생기는 것일까 앞만 보며 달리던 계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아이를 목말 태우고 화창한 날을 걸었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던 봄날이 있었다 차오르는 숨을 누르며 더 빠르게 높은 곳을 향해 달렸었다 등에는 달려온 만큼 휘어진 속도가 모질게 박혀 있다 갈랫길에서도 주저하지 않던 추진력은 순종의 자세로 단단히 묶여지고 어느 날부터 녹이 슬기 시작했다 녹은 고요하게 들어왔다 제동에 하나 둘 균열이 일고 안장이 사라지고 바퀴마저 달아나 속도가 멈춘 일생이었다 누구의 손이건 저마다 쥐고 있는 브레이크 있어 과속을 잡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움켜쥔 두 손이 영영 그를 멈추게 했는지도 모른다 속도가 사라진 곳에는 녹슨 관절의 삐걱거림만 붙어 있다 잠겨 있는 단단한 틈에..

젊은 시인이 늙을 때까지 쓴 시/ 김누누

젊은 시인이 늙을 때까지 쓴 시 김누누 젊은 시인이 가장 먼저 스킨 케어 제품의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유통기한 지난 스킨 케어 제품 사용은 오히려 피부에 독이 될 수 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서다. 유통기한은 따로 표기되어 있거나 패키지에 적혀 있었다. 패키지는 옛적에 버린지라 젊은 시인은 몇몇 제품의 유통기한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유통기한이 지났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사람이 늙을 수 있는 건가?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하고 젊은 시인은 생각했다. 젊은 시인이 그다음에 확인한 것은 핸드폰이었다. 시를 쓰는 동안 설정해 두었던 방해 금지 모드를 해제했다. 부재중 연락이 몇 건 와 있었다. 그중 두 개는 대출 문자였으며 나머지는 친분이 있는 시인들과 만든 단체 채팅방에서 시인..

믿는 사람/ 전욱진

믿는 사람 전욱진 보고 싶은 사람은 어제에 있고 영원의 근처를 나는 서성인다 이제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 하는데 그때 천천히 내 앞에 굴러오는 작은 공 나는 모르는 체하며 지날 수 있고 수풀이 있는 데로 내던질 수 있다 그러나 눈빛을 먼저 건네고 있는 그들이 아무쪼록 받을 수 있도록 포물선을 그리게 잘 던져 주는 것 이곳에서 나의 기쁨이란 이런 것 보고 싶은 사람은 어제에 있고 이렇게 나는 또 날짜를 스스로 조용히 옮겨 적고 있지만 그 사람은 내가 다가온다 말하고 나는 그 사람이 내게 온다 말한다 눈이나 비처럼 하나하나 온다는 것 이곳에서 나의 슬픔이란 이런 것이다 -전문(p. 180-181) ----------------------- * 『계간파란』 2023-겨울(31)호 에서 * 전욱진/ 2014년『실..

잠적/ 백순옥

잠적 백순옥 안개와 그녀의 눈썹 사이 바위섬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물줄기 사이를 구르는 몽돌 붉은 등대 너머 수평선이 지워지고 늑골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소리 안개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상체를 들고 서성인다 해송 숲에 대보다 동백꽃에 대보다 몽돌밭에 내려놓는데 돌멩이는 얼마나 오랜 세월 물살에 저를 내준 걸까 아이가 걸어갔던 길을 적시는 파도 소리 안개가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줄에 걸린 미역과 방파제는 귀도 보이지 않고 해풍 속으로 흰 새가 날아간다 점차 지워지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몽돌 소리만 동백 숲으로 가고 -전문(p. 174-175) ----------------------- * 『계간파란』 2023-겨울(31)호 에서 * 백순옥/ 2011년『딩아돌하』로 등단, 시집『깊어지는 집』『바늘무늬 바람』

이민 가방을 싸는 일/ 정영효

이민 가방을 싸는 일 정영효 몇 개가 필요한지 몰라 세 개만 샀습니다 하나에는 옷을 담고 하나에는 잡화를 담고 하나에는 아직 혼자 떠나는데도 분리를 잘해야 하고 분리를 잘할수록 정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을 줄이며 짐을 늘리며 가방 안에 맞는 구조를 만들어 보다가 그 나라에는 비가 자주 온다고 해서 나는 우의를 챙겨 넣습니다 우의는 분명히 옷이지만 잡화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어느 쪽에 자리하든지 적당하다면 이름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한데 이곳에서는 내가 계속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나를 제일 모릅니다 먼 거리를 함께할 가방은 가로와 세로가 튼튼해 보입니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지만 도착한 기분으로 나는 생활을 이어 갈 구성을 찾습니다 짐을 푸는 순간 거주는 시작되니까 이곳과의 차이를 확인..

축시) 한글 나라 높이 올릴 빛기둥을 세웠어라/ 이근배

한글 나라 높이 올릴 빛기둥을 세웠어라 - 「서울문학광장」 창건에 바침 이근배/ 시인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활짝 열린 축복의 새 아침입니다 오랜 역사 한 겨레 한 마음 다져온 위에 세종 큰 임금 훈민정음 창제하시어 나라 말씀 위에 겨레글자 펼치신 지 올해로 5백7십 년을 맞사옵니다 저 바깥 세계의 8십억 인류들이 일제히 일어나 으뜸의 글자 한글을 우러러 손뼉 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기뻐서 우리 8천만이 하나 되어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뮐새 꽃 좋고 여름 하나니 용비어천가 제2장의 첫 행만 읽어도 우리 온 겨레 지구촌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홍익인간의 평등, 자유, 만복이 넘쳐흐르고 산도 물도 들녘도 집집이 글 읽는 소리 온 누리 가득히 넘쳐나고 ..

마음이 너무 컸던 소년/ 박하은

마음이 너무 컸던 소년 박하은 마음이 너무 커서 마음을 접어야 했던 소년이 있었다 비가 오면 가장 먼저 젖는 마음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펄럭이는 마음 소년은 그 마음을 일단 접어놓곤 밤마다 몰래 펼쳐 보곤 했다 소년은 마음으로 비행기를 접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먼저 30평짜리 집을 접어보라 했고 소년은 마음에 미래를 그려보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먼저 수학 공식을 베껴 오라 했다 그러다 소년의 마음은 집도 비행기도 아닌 것으로 구겨지고 말았다 한때 소년이었던 청년은 구겨진 마음으로 한 사람을 품었다 그런데 사람은 소년의 마음을 깨고 사랑으로 부화해 다른 둥지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그의 마음 조각엔 눈물 자국만 남아 무늬가 되었다 소년이었고 또 청년이었던 그 노인은 이제 찢어진 ..

자화상/ 김가림

자화상 김가림 헐떡거리는 이보다 헐떡이는 소리를 듣는 이가 더 아프다 불규칙한 호흡이 엇박자로 나를 쏘아댈 때면 하릴없이 창밖을 본다 불이 꺼진 지 오래 어릴 적 엄마가 뜬 인형에서 미지근한 눈물 냄새가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몰려오는 적막 깊어서 바닥을 헤아리지 못할 적막이 내 얼굴에 자국을 낸다 엄마는 그걸 천사의 키스라 불러주었지 잠든 척 침대에 누워있는 내 머리칼을 쓸어주던 엄마 사춘기를 핑계로 엄마를 힘들게 한 내게 미안하다 말하던, 나는 그런 따뜻한 엄마를 알고 있다 방문을 닫고 나가는 엄마 뒷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데 창문에 매달린 어린 별이 나를 보며 반짝여준다 엄마, 미안해 속으로 말을 해도 알아듣겠지 엄마는 뭐든 다 아니까 언젠가 나도 엄마가 되어 나를 꼭 닮은 아이를 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