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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홍배_시에세이『빵 냄새가 나는 음악』/ 음악가들의 마지막 남긴 말

음악가들의 마지막 남긴 말 - J.S. Bach- Come, Sweet Death 배홍배 □ 바흐: 내 죽음을 슬퍼 말아라. 난 음악이 태어난 곳으로 간다. 그의 임종을 지키던 가족들에게 남긴 말이다. (p. 420) □ 하이든: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잘 살았다. 전하는 사람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하이든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하인들 집에 대포 탄이 떨어지자 그들을 위로하고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p. 420) □ 모차르트: 죽음의 맛이 입술에서 느껴진다. 이 맛은 세상의 것이 아니다. 죽는 순간에도 천재다운 말이다. (p. 420) □ 베토벤: 애석한 일이다, 아 너무 늦었어. 그가 주문한 와인이 제날짜에 도착하지 않고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날 와인을 받..

애틋한 뒷모습 외 1편/ 김미옥

애틋한 뒷모습 외 1편 김미옥 낡은 책에 유난히 눈길이 간다 모서리 해지고 겉장 너덜거리지만 그만큼 사랑받았다는 흔적 아니, 자신을 끝없이 내주며 세상에 온 몫을 제 몸 마르고 닳도록 해낸 뒷모습 문득 오버랩되는 얼굴이 있다 연약한 뼈마디 어긋나도록 생명 품어 안고 삶을 가꾸느라 지문마저 지워진 사람 세상 환하게 밝혀주고 뚝뚝 떨어진 목련꽃잎 거멓게 저물어가는 모습에도 자꾸 마음이 간다 -전문(p. 131) --------------------------------- 썰물 발자국에 기대고 안면도 갯벌에서 물의 발자국을 보았다 바다로 한 발 한 발 걸어나간 썰물의 흔적 물너울 부드럽게 지나간 자리에 줄무늬 싱싱하다 갈매기 몇 종종거리며 노란 부리로 헤집어 보지만 길게 늘어선 물 그림을 지우기엔 어림도 없다..

귀 걸어놓은 집/ 김미옥

귀 걸어놓은 집 김미옥 어머님 떠나시고 빗장 걸렸다 하루아침에 입 닫힌 집은 몇 년째 귀 익은 발소리 기다리고 있다 아랫목 도란거리던 이야기꽃 열무김치 익어가던 냄새 헛간과 뒤꼍에 걸려있던 종자마늘 알록달록 그 많던 추억은 빈집의 흐린 역사가 되었다 햇살과 바람 무시로 드나들어도 액자 속 비붙이들 풀죽어 시나브로 표정을 잃어간다 해가 서쪽에서 뜬대도 한번 닫힌 입 쉽게 열리겠는가 일곱 식구 안식처였던 저 빈 둥지가 다시 온기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먼지 꽃 뿌옇게 핀 장독대에는 고양이 발자국만 어지럽다 그 서늘하고 알싸한 그리움이 아프다 마을 꼭대기 초록 대문 집 오늘도 늙은 감나무 높이 귀 내걸고 대숲 바람소리에도 쫑긋거리며 문 활짝 열어줄 손길 기다리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고향을 시간과 ..

이찬_'문질빈빈' 또는 '백비'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사랑 : 김수영

사랑 김수영(1921-1968, 47세)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전문- ▶'文質彬彬' 또는 '백비白賁'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사랑」은 짧은 마디와 작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김수영적 사유의 특이점을 표상하는 "대극對極"과 "양극의 긴장"이 은은한 날빛으로 정제되어 수려한 이미지로 아름답게 채색된 시이다. 더불어 우리 모두의 "사랑", 그 근저에 도사린 불안과 두려운 낯섦을 빠른 리듬감으로 응축된 반복 어구의 탄력과 파장으로 상기시키는, 김수영의 걸작 중의 걸작이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 "어둠"과..

배홍배_시에세이『빵 냄새가 나는 음악』/ 개를 위한 엘레지와 베토벤의 이야기들

개를 위한 엘레지와 베토벤의 이야기들 -Beethoven: Song for Voice and Piano, WoO 110 Elegle Auf Den Tod Eines Pudels 배홍배 □ Elegle auf den Tod eines Pudels(죽은 개를 위한 엘레지): 베토벤 이야기에서 첫 번째 미스터리는 그의 생일에 관한 것이다. 그의 생일에 관한 기록을 보면 1770년 12월 27일 본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만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베토벤은 피아노와 오르간, 바이올린을 배우고 7살에 콘서트에서 첫 연주를 했다. 12살 때 이미 작곡을 시작했는데 그때 쓴 곡의 이름이 재미있다. 하나는 이고 뒤에 쓴 것은 였다. 그런데 그 행운의 개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 1792년 베토벤은 비인으로 이..

에세이 한 편 2024.02.17

바닥론 외 1편/한영숙

바닥論 외 1편 한영숙 퍼붓던 지난겨울 눈들이 하늘의 바닥이었다는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그 두꺼운 밑바닥을 다 쓸어내고 나면 뻥 뚫린 파란 구멍이 보였어 얼굴 깊이 묻고 엎드려 소리치면 빈 항아리 울음소리 같은 게 웅웅 귓전을 때렸어 하늘이 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누군가에게 속을 내보인다는 것 갈비뼈 한 대 뚝 떼어준 시린 옆구리 같았을. 새 발짝 하나 찍히지 않은 흰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누군가 들뜬 마음으로 환호를 질러댔어 또다시 눈이 내렸어 하늘 바닥은 어느새 콱 막혀 있었어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거리와 골목은 눈 천지로 푹신거렸어 사람들도 슬슬 몸서리를 치기 시작했어 나도 어느 틈에 눈으로 뭉쳐진 돌멩이가 되어 있었어 자동차도 아파트도 거대한 흰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어 그들..

회화나무/ 한영숙

회화나무 한영숙 오 육백 년 된 회화나무를 본 적이 있다. 그 둘레는 어른 몇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었다. 긴 세월 속에 담겨진 자기 삶을 관조하는 걸까. 나무는 묵묵히 제 발치만을 내려다보고 섰다. 고작 반 세기를 살아온 나로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정신적 깊이와 넓이를 지난 나무였다. 또한 여름 한 철이면 매미들은 그 나무의 끝 간 데서 만언소萬言疏를 올리기도 했다. 회화나무와 매미 그들이 들려주는 저 무언의 설법을 나는 조용히 받아 적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한 그루의 고목을 바라보며 그에 대한 심상을 담담하게 밝히고 있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다만 나무를 바라보며 멈춰 서 있다. 그 시선 역시 고목에 고정되어 있기에 이 시에서 물리적인 운동성은 대체로 자제되어 있다 말할 수 ..

이찬_'문질빈빈' 또는 '백비'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사랑의 발명 : 이영광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 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시집 『나무는 간다』(2013. 창비) 전문   ▶'文質彬彬' 또는 '백비白賁'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사랑의 발명」이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어마어마한 상상력의 크기와 그것이 수반하는 광대무변한 내용의 '자기 함량 운동'에서 선득한 느낌으로 휘감아 오듯, 이 시는 이영광의 다른 "사랑" 시편들이 보여 주는 생동하는 현장감을 고스란..

배홍배_시에세이『빵 냄새가 나는 음악』/ 모차르트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모차르트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모차르트: 미뉴엣 G장조 (네 살 때 쓴 첫 작품) 배홍배 80이 넘은 노 피아니스트가 고목나무 가지처럼 마디가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4살짜리 어린 아이가 작곡한 곡을 친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을 노 피아니스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천상의 긴장감을 느끼는 듯 이따금 꼬이는 손가락이 건반을 더듬거린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나면 먼저 모차르트와 비교를 한다. 모차르트는 그만큼 천재 중의 천재로 알려졌다.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스타일은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가 그에게 다가와 그의 머리와 입과 손을 통해 음악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35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600여 곡을 남긴 그는 누구보다 음악적으로 장수한 셈이었고 그에 따른 이야기도 많다. 200..

에세이 한 편 2024.02.15

엄격하고 고상한 음악에로의 여행/ 배홍배

엄격하고 고상한 음악에로의 여행 - J.S. 바흐: Duetto No. 4 in A minor, BWV 805 배홍배 낡은 타자기에서 시계 소리 들렸다 자판이 가리키는 시간 속에서 소비되는 음악 비용은 손가락 끝에서 올라가고 빙긍빙글 도는 턴테니블과 의자를 가까이 붙이고 바흐의 유작을 듣기 위해 바로크 코트는 윈도우에 걸렸다 흰 머리에 붉은 빵모자를 쓴 교황을 위하여 오래된 나무의자를 딛고 유리성당을 쌓은 늙은 DJ 뛰어내린 창문 안으로 얽힌 팔에게 스스로 묻고 한 번 풀리는 걸음으로 두 갈래로 갈리는 길에 흰 할미꽃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 돌부처가 되었다 시곗바늘이 더듬은 그의 둥근 안경이 한 점, 점으로 남을 때 - 시 「오래된 음악실」, 전문 ▣ 이 작품은 다양한 템포의 변화에 대한 해석이 있지만 조..

에세이 한 편 2024.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