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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을 만들다 외 5편/ 신현정

눈사람을 만들다 외 5편 신현정(1948-2009, 61세) 눈과 코를 만들고 코 밑에 생솔가지를 붙여 그럴듯하게 수염을 만들어주고는 적어도 눈사람은 무슨 소리가 뒤에서 나도 서 있는 그대로 앞만 바라보게 했다 세상을 모나지 않게 둥글게 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생각하면 뒤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앞만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밤에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그것을 눈사람에게 시켰는가 말이다. -전문(p. 41) --------- 주먹 꽃에도 주먹이 있나니 한 때를 살고 망가지는 것들은 주먹을 가지고 있나니 주먹이 있기 때문에 서럽고 뜨겁고 망가진다고 말할 수 있나니 오늘 두어 송이 망가지는 주먹이여, 허공에 가만히 들이밀고 가장 고요한 주먹이여, 고요히 망가지는 주먹이여. -전문(p. 15) ---..

isseu 비등단/ 채상우

isseu 비등단 채상우 이번 호 이슈에 시론을 게재하는 시인들은 따로 등단하지 않고 파란에서 첫 시집을 발간하였거나(서호준, 김누누, 임후, 이효영, 이유야) 곧 발간 예정인(이재영) 이들이다. 그리고 산문을 실은 윤유나 시인도 이들과 같은 경우다. 그런데 이들을 두고 '비등단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일은 뭔가 꺼림칙하다. 시집을 발간했다면 그 순간 등단했다고 셈해 주기 때문이다. 그보다 '시인' 앞에 등단 여부를 적는 일도 참 겸연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비등단 시인'이라고 감히 불러세우는 이유는 '비등단'이 환기하는 여러 맥락 때문이다. 물론 그 문맥의 대부분은 곧장 '문단 권력'과 같은 정치적인 쪽으로 눈길을 옮길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언제나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좀 비켜서 ..

권두언 2024.02.18

등단이 중요한가? 시집이 중요합니다(부분)/ 김언

등단이 중요한가? 시집이 중요합니다(부분) 김언 등단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을 배려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이 용어에 대해 누군가는 다시 딴지를 걸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미등단이라는 말과는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냐고요. 어감이 조금 달라졌을 뿐 비등단과 미등단, 이 둘을 체감하는 입장에서는 실제로 별다른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괜히 배려하는 척 허울 좋은 용어로만 대체해서 부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마치 '지방'을 대신하여 '지역'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서울 중심의 구도에서 소외된 지방의 현실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미등단 대신 비등단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등단하지 않은 이들의 현실적인 여건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 까요? 비등단자든..

타이탄/ 이재영

타이탄 이재영 얼마 전 단 한 번도 바다에 가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바다를 분필로 벽에 그려 나에게 보여 줬다 바다는 네모난 박스였다 그 안에 아이도 노인도 들어가 있고 물고기도 들어가 있고 별도 있고 태양도 있고 염소도 있고 텔레비전과 수도꼭지도 있었다 바다에는 도로가 나 있고 그곳으로 자동차와 말과 탱크가 있었다 이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바다인가요라고 묻자 그는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그냥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다고 대답했다 바다는 항상 입을 벌리고 있다 커다란 몸을 갖고 있어서 먹는 것도 많다 밤마다 태양도 먹고 아침마다 다이버들도 먹는다 바다에 능숙한 동물들은 해변으로 올라와 바다에 삼켜지지 않지만 삼켜진 것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하나같이 말이 없다 나는 무척 기쁘거나 무척 환상적이어..

리무진 외 1편/ 문설

리무진 외 1편 문설 할머니 벚꽃 길 따라 가네 천천히 살다 가네 스물여섯 해 기다려 온 할아버지께 삼베옷 차려입고 신혼 방에 드네 백발 어린 딸은 오늘밤 어머니 외롭지 않을 거라고 손뼉을 치네 바람 든 무릎은 절하기도 버겁네 당숙은 좌우명이 굵고 짧게라며 연신 소주잔을 비우네 100년을 굽이굽이 떠돌던 할머니 동전 삼만 냥 쌀 삼천 석 입에 물고 마을버스 타고 다니던 그 길 따라 리무진 타고 마을 뒷산으로 시집가네 벚꽃 향 분칠하고 오래된 남편 품에 안기네 -전문(p. 114-115) ---------------------------- 죽문설방竹門設方 4월과 5월에 내리는 비를 흠모하는 것은 대나무의 오랜 습성이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눈썹달처럼 대나무숲이 휘어지는 건 무림의 고수들이 낭창낭창 싸움을 하..

사려니숲*/ 문설

사려니숲* 문설 사려니숲에 가서 알았습니다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한 냄새를 이 숲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방금 이곳을 다녀간 소나기도 이 흙의 냄새를 물고 날아갔습니다 흙의 체취는 오래전 내 기억 속에 살았습니다 삼나무, 졸참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마, 서어나무··· 길목에 펼쳐진 풍경에 감정되어 자박자박 걷습니다 길은, 아는 길은 아는 곳으로 낯선 길은 낯선 곳으로 통합니다 세상의 시비是非도 이곳까지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나는 오래된 불통을 소통으로 바꾸어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넘을 수 없는 마음도 이곳에 오니 야트막한 언덕으로 보입니다 팔이 잘려나간 나무들은 송글송글 피가 묻어있습니다 이 상처를 가라앉히느라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워야 할까요 나는 내 작은 상처에도 꼬박 밤을 새운 적이 있습니다 흙비의 얼룩..

한용국_내가 만난 '현대'의 눈(발췌)/ 모종의 날씨 : 김언

中 모종의 날씨 김언 설마, 하고 눈이 왔다 아닌가, 하고 진눈깨비 내렸다 정말이지, 하고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함박눈, 나는 먼 길에 서서 독백하는 사람과 자백받는 사람의 표정이 저러할까 싶은 표정으로 같은 하늘과 다른 구름을 지켜보았다 그는 불어왔다, 불어 갔다 날씨보다 정치적인 것은 없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일러 주는 많은 밤은 거짓말이었다 설마? 하고 눈이 왔다 아니지? 하고 아지랑이가 피었다 그가 어떤 모자를 썼던가? 빨간. 그가 어떤 말을 하던가? 푸른. 정말이지, 그는 내일 강연할 증거가 하나도 없다 그는 마치 그림자가 다가오듯이 나를 대한다 언젠가 사람들이 눈물을 그치었다 생각하는 오늘 같은 밤이 또 있을까? 물론. 별은 그가 반짝인다 - 시집 『거인』, (문예중앙,..

권두언 2024.02.18

다정하다 외 1편/ 함태숙

다정하다 외 1편 함태숙 천사는 고아처럼 버려져서 자기가 만든 환각으로만 천국을 상상할 수 있다 자급자족만큼 슬픈 게 있을까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받치고 천국이 음악이라면 돌들의 청음을 듣기 위해 바닥에 깔리겠지 지하를 한 번도 손보지 않은 천국의 지붕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지층의 방 천사가 걸으면 눈물방울에도 소리가 난다 버려진 것들을 둥글게 둥글게 부르는 도레······ 홀로 불러보는 이름처럼 잊혀도 남아 있는 다정한 음계를 가여운 천사가 떠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발밑의 천국을 -전문(p. 102-103) -------- 봄밤 이 거대한 짐승을 끄고 돌멩이 하나에 눈둥자를 묻는 것을 보았다 영원에 필적하는 것들이 하나의 우연과 하나의 개별성에 의탁해 오는 밤을 별과 돌의 공명 내포하기 위..

가장 작은 신/ 함태숙

가장 작은 신 함태숙 흰 비닐 주머니에 휴지 같은 돈을 쑤셔 넣고 너는 또 큰 눈을 깜빡인다 우수수 온 도시가 다 사원이라는 그 이름의 석불에서 분진처럼 경전이 쏟아진다 소음은 가장 거룩한 침묵 시엠레아프의 밤 골목을 나와 짤그랑거리며 너는 다른 세상을 밟아간다 가장 높다는 수미산 거기서 무얼 태우는지 네 가는 발자국에 흰 재가 소복하고 뿌리 끝에 진흙을 묻힌 채 꽃들은 흰 봉다리 같은 입을 오므렸다 벌린다 무지하고 천진한 맨발의 행렬이여 구원은 왜 걸인처럼 자꾸자꾸 내려오는 걸까 버짐 핀 검정 개와 매 맞는 저녁을 불러와서 -전문(p. 121) 시인의 말 네 번째 시집을 묶는다 그리고 2월 20일은 한 사람의 첫 기일이다 가장 작은 신에 입관한다 2024년 1월 함태숙 ------------------..

유언/ 김제이

유언 김제이 나는 입을 열지 않는 이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필연을 깨는 평온한 세상으로 떠나겠다 선언하고는 허연 입술 사이 캄캄한 입속으로 담담히 걸어 들어갔다 기꺼이 삼켜지는 것들은 철저히 불태우는 것이 그가 떠난 잇속의 법칙이었다. 입이 바쁜 사람들은 그의 입속에 든 것을 맞추겠다 질긴 토론의 장을 열었으나 그의 입은 열리는 법이 없었고 그 시뻘건 골 속엔 식은 단어들만이 자유로이 떠돌다 꿀꺽 삼켜졌다 삼켜진 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명백한 불가사의가 되었다 투명한 단백질의 진물이 이 사이로 새어 나오도록 지치지도 않고 요란하게 열고 닫히는 틀니의, 고기가 되어 입과 입으로, 그만 영영 살아남고 말았다 그의 유언장은 불태워졌다. 나는 입을 열지 않는 이를 만난 일이 없다. -전문(p.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