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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길을 함께 걸어온 벗이자 품 넓은 선배/ 박완호

시의 길을 함께 걸어온 벗이자 품 넓은 선배 박완호 김정수 시인은 오랫동안 시의 길을 함께 걸어온 벗이자 품 넓은 선배이다. 남다른 언어 조립공의 기질을 타고난 그는 처음 만난 이십 대 초반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느 길이든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결코 샛길로 빠지는 법 없이, 고집 세고 뚝심 있는 성품이 돋보이는 시인의 면모를 꾸준히 보여주었다. 그렇게 사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한눈을 팔지 않고 우직스럽게 자기의 길을 찾아 걸으며 차곡차곡 쌓아온 그의 내공은 최근 들어 놀라운 성취의 경지를 유감없이 펼쳐 보이는 중이다. 성실한 시 쓰기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작품 발표를 기본으로 수년째 매주 일간지에 연재하는 시 읽기 및 월간지의 시집 읽기 코너, 다양한 시집의 해설 및 여러 문학지에 게재해온 시평 등 웬..

에세이 한 편 2024.02.25

밀림, 도시, 본능/ 최은묵

밀림, 도시, 본능 최은묵 사자는 죽을 때까지 사자, 들개는 죽을 때까지 들개, 물을 마실 때는 악어를 조심해, 합의된 구역이란 없다 떡볶이 골목, 막창 골목, 순대 골목, 사자는 바람을 등진 녀석을 찾지, 하이에나는 사자 주변을 맴돌고 물소 혼자 사자에게 덤비는 장면은 왜 매번 느린 재생일까요? 버림받은 당신의 봄처럼요 송곳니가 뱃가죽을 찢는다 땅에 떨어진 뿔은 무엇도 지키지 못한다 차례대로 배를 채우는 빌딩들 난 왜 뾰족한 이빨을 보면 흥분될까요? 건기는 악어가 사냥하기 좋을 때다 출입문에 점포임대를 붙여 놓고 누떼는 물아 찾아 떠났다 해 질 무렵 먹잇감을 노리는 들개 떼, 한쪽의 죽음은 다른 쪽의 미소 배부른 맹수의 눈을 본 적 있나요? 봄을 닮은, 아이는, 낳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은 골목 깊은..

봉쇄수도원/ 김기형

봉쇄수도원 김기형 불을 끄는 사람이 많아요 혼자의 얼굴을 혼자 보는 사람이 앉아요 팔과 다리에 흰 연기가 피어올라요 밤새 불을 피웠습니다 종을 쳤습니다 뒷모습이 되려고 닦이지 않는 오늘의 빛이 되려고요 당신도 머리를 숙이고 있지 않나요 당신도 머리 없이 망토를 두르고 제 몸을 그리고 있지 않나요 당신이 공손하게 말합니다 제가 닦은 흰 접시 제가 만든 흰 우유 제가 지운 흰 눈동자 흰 기억 잊힌 것은 잘 개인 수건과 같습니다 바닥을 닦는 흰 바람 같습니다 순한 눈雪 같습니다 당신은 어지럽지 않나요 강보에 쌓여 울다보면 아이가 되지 않나요 우리는 가루가 되고 송곳이 되고 다리가 되고 기우뚱해지고 표정이 되고 아무 일이 없는 생각이 돼요 지금 막 흰 돌, 당신이 구워낸 당신에게 도착한 둥근 준비 그것 앞에서 ..

Who Iide, chicken?/ 김건영

Who lide, chicken? 김건영 누가 구라를 쳐, 겁쟁아 한국인은 모두 치킨을 좋아하지 치킨은 빨라 겁쟁이는 모두 빠르지 겁쟁이는 거짓말보다 빠르지 겁쟁이는 판단을 유보하지 우리 싸우지 말자, 라고 말하는 애는 선빵 치고 난 겁쟁이 반반이 좋아서 나라도 반반이야 나라도 그렇겠다 안전제일 반반은 안전하고 반반은 한쪽이 붉지 Who Ride, chicken! 겁쟁이를 타고 그는 나타난다 취향을 통일하라 통일이 새로운 독재라니 반반에다 투표하자 중립 만세 반반으로 반반한 사람들끼리 만나자 不信으로 대동단결! 내가 정의로우면 나머지는 모두 악당이 되는 거야 정의가 우리를 정의한다 정의당한 겁쟁이들 올라타라 살아남아야 도망칠 수 있다! 겁쟁이 타도 겁쟁이 타도 우리는 달린다 우리는 후달린다! 이봐 이제 ..

카론의 강/ 이봉주

카론의 강 이봉주 의사가 아버지의 임종을 예고한다 내 마지막 인사가 아버지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꿈결인 듯 어디선가 들리는 아버지의 화통 같은 목소리 어이 뱃사공 어이 뱃사공 술이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가 나룻배 터에서 강 건너 사공을 부르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흐르는 한 줄기 강물 내 아픈 기억은 저 강물 속으로 바위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버지는 어떤 기억이 저 눈물을 흐르게 했을까 기억은 아플수록 더 깊은 곳으로 흐르는 것인지 내가 백 년을 엎드려 울어도 닿을 수 없는 깊고 깊은 강물 그 강물 위에 카론의 삿대가 어둠을 가르며 건너오고 있다 -전문(p. 178) ----------------- * 시 계간 『상징학 연구소』 2024-봄(13)호 에서 * 이봉주/ 2014년 신인상 & 2016년 ..

이숭원_불확정의 우주로 유영하는 산문시(발췌)/ 까마귀의 밤 : 서대경

까마귀의 밤 서대경 헌책방 구석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작은 책상에 코를 박고 잠들어 있던 백발의 노인이 퍼뜩 깨어나 고개를 들어올린다. 문 닫을 시간이야. 노인의 왼쪽 눈이 소리친다. 벌써 어두워졌군. 노인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중얼거린다. 문 닫을 시간이라고. 알아. 노인이 대답한다. 노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침침한 조명 아래,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책장들 사이로 난 비좁은 통로를 걸어간다. 영업시간이 끝났으니 내일 다시 오시오! 노인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친다. 노인은 산발한 머리를 갸우뚱하며 오른쪽 눈이 깨어나길 기다린다. 일어나, 게으름뱅이야! 노인은 잔나비가 춤을 추듯 몸을 앞뒤로 건들거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책상 위에 놓인 원고 뭉치를 내려다본다. 노인은 원고를 집..

그렇게 지나가는 낮과 밤/ 송재학

그렇게 지나가는 낮과 밤 송재학 산행 중에 길이 사라졌다 나를 삼키고 안개는 내 생각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소리가 소리를 따라가며 실타래처럼 뒤엉키는 물소리 바람 소리 돌 구르는 소리, 정작 멱살을 움켜쥐는 건 정적이다 내 손을 붙잡는 흰 손인지 갸름한 손인지 무섬증은 갈대의 하늘거리는 줄기와 닮았다 독백처럼 발을 헛디디자 이건 생의 누락이라는 느낌이 다가온다 산인지 무엇인지 내 앞에서 자전하고 있는 거야 나의 행방불명 앞에서 불행이라는 실루엣이 곳곳에 있는 거지, 슬며시 좁은 길이 나왔다 처음 안개를 만난 곳, 떨어지는 체온 때문에 서걱대는 조릿대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뭇가지가 여기저기 마구 뻗어 있다 바로 옆의 낭떠러지는 비명을 높이만큼 새긴다 내 그림자부터 무덤인가 의심했다 시간이 지나서 잊을 수있는..

해안/ 박용하

해안 박용하 파도에 시체가 떠밀려온다 강물에 시체가 떠내려온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내가 사는 나라와 나라 밖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일어날 일이다 파도는 파도를 밀고 밀려 나아가고 파도는 파도에 밀리고 밀리면서 마침내 크게 한숨을 몰아쉬며 폐부를 해체하듯 백사장으로 쓰러진다 거기서 멀지 않은 해안 절벽으로 파도는 대가리를 산산조각내고 다시 바다에 합류한다 파도는 부서지고 깨져도 파도고 그러거나 말거나 바다는 평정의 바다고 내가 사는 나라 밖에서는 상상 이상의 시체가 떠내려가고 떠밀려온다 내가 사는 나라라고 별다를까 세계가 죽음의 파도로 연결돼 있다 -전문(p. 69) * 블로그註: 외국 지면에 소개된 대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 * 시 계간..

온통 비라서/ 강재남

온통 비라서 강재남 어쩌다 이렇게 만났을까요 부질없는 것은 늘 부질없는 것이 되버려요 너를 가늠하는 밤엔 꽃나무가 생겨났죠 흩어지다가 모양을 바꾸다가 사라진 후 묵념하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꽃나무가 울어요 질긴 질감을 가진 울음이 지나면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생각해요 잠시 왔다 간다거나 꽃나무를 떡갈나무로 부른다거나 조금씩 넓어지는 우산이 되어 어둠에 누워 흘러간 생을 만져요 이런 일이 너의 속성이라면 그날 복화술사의 휘파람은 온통 네 것이었겠군요 어둠은 민낯으로 세상을 살았고요 너는 촘촘한 이야기를 남겼겠어요 오래 참아서 낡아버린 마음과 누대를 거쳐 허물어지는 마음과 끝까지 가보지 못한 마음과 부지런히 잊어야 하는 마음 어떤 곳에도 머물지 못하는 마음이 최선을 다해 투명해져요 뜨거운 너는 내가 되기도 ..

『상징학 연구소』/ 자유시론_시 창작 & 상징학Ⅴ

시 창작 & 상징학 Ⅴ 창작연구실 상징은 변치 않는 불변의 본성과 그 본성이 작용하는 실체, 그리고 본성이 작용하여 구현하는 상징물의 세 국면을 보여줍니다. 상징의 본성은 '동일화'이고, 실체는 동일화 정신작용인 우리의 사고이며, 그 결과물은 기호입니다. 기호는 우리가 지식이나 의미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기호로부터 우리는 사고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사고는 기호를 재료이자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사고는 새로운 지식의 기호를 얻음으로써 수행을 종료합니다. 사고는 매개를 사용해서 다른 대상이나 기호들을 인과적으로 통일하는 상징이자 상징작용입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상징의 실체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은 다양하게 변화 발전하는 문화 현상 속에서 변주되어 나타나는 상징의 형식과 상징물..

한 줄 노트 2024.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