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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외 1편/ 원가람

목련 외 1편 원가람 당신께 가고 싶었습니다 봄 지나 여름 오면 여름 지나 가을이 오고, 가을 지나 겨울 오면 늘 항상 그렇게 가 닿고 싶었습니다 아무런 주저함 없이 후회도 없이 천방지방 들쑥날쑥 천방지축 그렇게 잎도 생략한 채 당신께 피어나던 그 순간. -전문(p. 66) ------------------ 대나무 스키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 절지동물이면서 수중생물처럼 휘적휘적 걷는다 다리에 공기주머니를 달고··· 너도 소금쟁이 같았다 뒷산에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무 잔가지에도 눈이 덮이고 풀숲에도 눈이 덮여 무릎까지 푹푹 빠질 때 너는 대나무로 스키를 만들었다 불에 대나무 앞부분을 그을리고 휘어 스키를 탔다 겅중겅중거리며 눈밭을 걸을 때는 다리가 긴 소금쟁이 같았다 친구야, 아무래도 잊히지 않는 이름..

추리극장/ 원가람

추리극장 원가람 학교 졸업작품에서 나는 안개를 깜짝 등장시켰다 무용수들이 긴 천을 들고 멈추었다가는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역할이었다 안개는 야산을 덮고 도로를 덮고 논밭을 덮었다 너는 어떤 이야기를 숨긴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가 너는 어떤 눈물을 숨기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가 너는 아가사 크리스티처럼 저들의 비밀을 찾고 있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은 대학시절부터 우봉 이매방 선생님께 춤을 학습한 무용수다. 외국의 경우, 무용수로 활동하며 시를 쓴 시인으로 마야 안젤루(Maya Angelou)가 유명한데 그녀의 시는 춤을 통해 강력한 언어와 리듬을 만들어 냈고 새로운 차원의 감정적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원 시인의 시편들도 춤사위에서 묻어난 몸짓과 동작이 언어에 유희를 더해주고 감정이 리듬과 함께..

시절인연/ 이용하

시절인연 이용하 동백나무 한 가지의 푸른 잎과 붉은 꽃, 기색도 없이 툭 진 꽃은 누나였습니다 봄이 채 오기도 전에 그리도 서둘러 달님 따라 서쪽으로 간 것인가요? 그날 이후 꿈에서나마 종종 만났는데 그 속에도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내 꿈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지요 아, 마주 보아도 서로 알아보지 못해 새로 핀 꽃을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전문(p. 46)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이용하/ 2019년『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시집『너는 누구냐』, 동인

우리 시가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 박수빈

우리 시가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 박수빈/ 시인 · 문학평론가 만물이 급변하는 요즘, 혼란스러울수록 맑은 의식과 정체성을 찾게 된다. 예술을 통하여 인간은 정신의 고귀함을 일깨워 왔다. 나무가 그렇듯이 뿌리가 튼실하면 세태라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유 시가의 뿌리는 향가鄕歌다.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서 향찰鄕札로 표기했으며, 진성여왕 때 대구 화상과 각간 위홍이 편찬한 『삼대목』은 향가 전문 사화집이다. 향가라는 명명에는 당시唐詩가 아닌 우리나라를 강조한 '국가國歌'로 주체적인 의지가 있다. 형식은 초기의 4구체에서 발전된 8구체, 삼국 통일기에 정형화된 10구체가 있다. 낙구 첫머리에 '아야阿也' 영탄구는 훗날 시조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전승된 향가를 통해 우리는 미학적이며 서정적인..

2023_인천작가회의 신작소설선집『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부분들

2023 인천작가회의 신작소설선집 『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 부분들 이재은 외 * 이재은_「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中 열다섯의 나는 어머니의 어머니인 박분분의 손에 맡겨졌다. 박분분은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천 원 이천 원을 쥐여주거나 그녀의 지갑에서 잔돈을 흠쳐 하드를 사 먹고 돌아오는 일탈을 눈감아주었다. 나는 캄캄한 방에서 눈 감는 일을 무서워했는데 박분분이 배를 문질러주면 조금 안락해졌다. 껍질을 칼로 깎았는데도, 그래서 과도가 눈앞에 있는데도 박분분은 입으로 과실을 베어 입에 넣어주었고, 나는 그런 박분분에게 의지했다 내성적이고 붙임성이 없었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바깥세상을 탐하기보다 책에 빠져 살았다. 소설은 나를 고독하고 안전하게 놓아둘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경험을 대신해주었기..

전라도 눈길/ 이창호

전라도 눈길 큰외숙모님을 추억하다 이창호 눈 덮인 들녘 얼음달빛이 차다 두승산 먼 능선 아래 달그늘이 시리다 가슴이 울컥 밀물 차오른다 창호야, 말 좀 해 보아라 말도 해야 느는 법이다, 잉? 아, 그 걸걸한 정 깊은 말소리 막내시누 그 막내아들 챙기시던 마디 굵은 목소리 -전문(p. 37)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이창호/ 전북 정읍 출생, 2007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거울』『6호선 갈아타는 곳』 등, 활동

그 역(驛)이 사라지다/ 정복선

그 역驛이 사라지다 정복선 봄눈에 아린 꽃눈을 내밀어 본 곳 그 역에 내린 지 이십여 년 삼삼오오 앉아서 지나온 철길과 역들의 모래바람을 토해 내던 곳 태풍에 떠밀려서 뒷걸음칠 때에 빠르게 떠나가는 기적소리에 하루를 베이던 곳 무연憮然히 주저앉았다가 다시 행성들을 따라 항해하려던, 아으, 그 역이 지구에서 영영 사라지다니 한 량輛의 나의 정신은 어느 역까지 가야 하나요? -전문(p. 24)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정복선/ 1988년『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선집 『젊음이 이름을 적고 갔네』, 시집 『종이비행기가 내게 날아든다면』『마음여행』『여유당 시편』등 8권, 영한시선집『Sand Relief』, ..

문학 1번지 종로와 김소월/ 오병훈(수필가)

문학 1번지 종로와 김소월 오병훈/ 수필가 종로는 서울의 행정 중심이며 600년 동안 나라의 문화와 교육, 경제를 이끌어온 고장이다. 특히 현대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염상섭 같은 수많은 문인이 종로에 거주하면서 문필활동을 해 왔다. 그래서 종로를 문학 1번지라 하는지 모른다.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김소월 또한 종로인이다. 그가 종로구 연건동 121번지 김억이 운영했던 에 기숙하면서 1925년 12월 25일 첫 시집 『진달내꽃』을 펴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옛 지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한국문인협회 종로지회에서는 남한 유일의 소월 유적지에 1918년 3월 16일 '소월 옛집'이라는 동판을 부착하여 이곳이 소월이 거주했던 곳임을 밝혔다. ..

에세이 한 편 2024.02.26

순수하고 맑은 사람, 권달웅/ 조창환

순수하고 맑은 사람, 권달웅 조창환 누군가 내 주변에서 시인다운 시인 한 사람을 찾아 말해보라 했을 때, 나는 대뜸 권달웅 시인이라고 답했다. 그는 시 쓰고 시 읽은 일 외의 다른 일상 잡사에는 무신경하다. 그는 오랫동안 교사 생활을 했고, 직장에서 은퇴한 지금은 서울 시내의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가끔씩 기르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일 외엔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는 문핟 단체의 대표를 맡거나 적극 참여하여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내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향이 경북 봉화에서 나고 자라 경북 안동에서 고교를 졸업하였다. 한양대학교 재학 시에는 박목월 시인에게 촉망받던 문학 지망생이었고, 시인이 된 후에는 한눈팔지 않고 순수서정시에만 몰두하였다. 몇 해 전 발간한 시집 제목이 『휘어진 낮달과 낫과 푸..

에세이 한 편 2024.02.25

내 눈을 빛나게 한 신예 시인, 나지환/ 정숙자

내 눈을 빛나게 한 신예 시인, 나지환 정숙자 날이 갈수록 우체함에 꽂히는 책들이 많아진다. 잡지며 시집과 평론집, 산문집 등등 21세기의 새로운 문예부흥기가 도래했는가 싶기도 하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러므로 보내오는 책들을 모두 읽으려 노력하지만, 하루 24시간으로는 밤잠을 줄여도 역부족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장마철이면 홍수洪水에 건수乾水가 들어 마실 물이 귀해지듯이 정작 감동적이거나 양질의 자극을 선사하는 시詩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계간 파란』 2023-봄호에서 신인상 시 부문 당선작 ’나지환‘의 「책등을 펼친 나비」를 보았다. 가파른 이론들이 섬세한 필치로 허점 없이 수렴되어 있었다. 아! 하고는···. 이 시인이 앞으로 써낼 글들이 궁금하고 또 기..

에세이 한 편 202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