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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시대는 갔는가?(부분)/ 구모룡

시의 시대는 갔는가?(부분) 구모룡/ 문학평론가 시의 위상이 궁금하다. 문학 내의 위계가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 차지하는 문화적 비중 말이다. 아울러 시인의 위치도 의문이 간다. 역시 문학장 내부의 위치가 아니라 사회적 자기를 알고 싶다. 물론 이와 같은 사회학적 물음에 쉽게 답이 주어질 리 없다. 대중을 상대로 시와 시인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는 질적이고 양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단지 오늘의 시를 누가 얼마나 읽느냐는 독자의 문제가 아니다. * 시의 사유화는 개성을 상품으로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시장 원리와 무연하지 않다. 물론 시는 강력하게 반자본주의를 천명하면서 감각의 특이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몇몇 노동 시인과 대안을 지향하는 생태 시인을 제외하면 시적인 것을 자기 지시적인 언어로 회수하는 탈정치적..

빗소리 새장/ 주경림

빗소리 새장 주경림 빗소리가 하늘에서 땅까지 빈틈없이 금을 그어요 주룩주룩 방음벽을 둘러쳐요 한참을 빗소리에 갇혀 있다 보니 비와 비 사이에 틈이 보였어요 눈곱재기창으로 먹구름이 가득 밀려와요 빗소리 듣는 마음은 들창으로 크게 열려 먹구름을 타고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까지 날아요 스르륵, 비와 비 사이에 우주가 광활하게 펼쳐져요 -전문(p. 134)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주경림/ 서울 출생,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씨줄과 날줄』『눈잣나무』『풀꽃우주』『뻐꾸기창』『법구경에서 꽃을 따다』(e북), 시선집 『무너짐 혹은 어울림』『비비추의 사랑편지』, 동인

와잠(臥蠶)/ 류미야

와잠臥蠶   류미야    어둠의 모양은 사각이 분명하다  무성한 그 모서리, 사각대지 않고는 그런 깊은 그늘을 기를 수 없는 일이다 모진 잠 귀퉁이를 서걱서걱 파먹으며 한 줄기 푸른 꿈을 순하게 길어 올리는, 소금꽃 눈가 어룽진 얼굴 하얀 누이야, 사는 건 그렇게 때로 그루잠 드는 일이다  둥글게 나를 껴안고 슬픔을 잊는 일이다    -전문(p. 144)   -------------------  *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작시> 에서  * 류미야/ 2015년『유심』으로 등단, 시집『눈먼 말의 해변』『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왜/ 이용헌

왜 이용헌 왜가리는 왜 지은 죄도 없이 한 발을 들고 서서 한 발을 허리춤에 몰래 감추고 서서 둑 너머 하늘이나 바라보다가 서서히 서서히 어둠에 갇히는지 왜가리는 왜 어둠에 물어본 적도 없이 어스름 강물에 발을 담그고 서서 어룽어룽 일렁이는 발등이나 내려다보고 서서 스르르 스르르 그루잠에 빠지는지 잠결에도 미처 다 못 감은 눈은 무겁고 물속에서도 살을 에는 바람은 불어 한 번쯤 기우뚱, 몸을 놓치기라도 하련만 왜가리는 왜 물낯처럼 흔들리는 법도 없이 한 발로 곧추서서 긴 밤을 견디는지 밤은 삼라를 가리고 꿈은 만상을 그려서 한 번 나온 꿈속은 다시 잇지 못할 터이지만 왜가리는 왜 돌아갈 거처도 없이 저 홀로 깨었다가 저 홀로 입선立禪에 드는지 -전문(p. 123) ● 시인의 말 한 선비가 길을 가다가 길..

4시 20분/ 정선

4시 20분 정선 데면데면한 봄이 왔다 못 견디는 시간이 있다 지루했다 놀이터를 바꿨다 둥근 것은 부드러이 스며들었다 총탄 속에서도 염소 새끼가 태어났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었다 새벽 4시 20분 철로에는 다정한 고래가 살았다 아이들은 흰긴수염고래게임* 속으로 스며들었다 고래와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팔목에 고래를 그려서라도 고래가 되고 싶었다 마치 바닷물을 빨아들여 물고기를 걸러 먹듯 흰긴수염고래는 아이들을 삼켰다 마침내 모두 고래가 되었다 새벽 4시 20분은 커다란 배가 가라앉기 전까지 발버둥 치는 시간 새벽 4시 20분은 불면인 내게 취약한 미필적 고혹의 시간 새벽 4시 20분을 베고 누웠다 수직으로 긴 숨을 내뿜는 하얀 고래의 길이 환했다 세상의 슬픈 목소리들은 사방에서 그치지 않았다 ..

티셔츠를 벗다가/ 이영옥

티셔츠를 벗다가 이영옥 목 좁은 티셔츠를 벗다가 셔츠에 갇혔다 셔츠는 아랫도리를 흔들며 먹이를 놓치지 않을 기세다 겨우 벗어 탁자에 던져둔 셔츠를 보니 탈피를 못해 죽은 뱀 같다 외피가 내피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뱀은 죽고 말아 몸을 내보내지 못한 가죽은 조마조마했을 거야 뱀이 삶을 포기하려 했을 때 뱀보다 더 무서웠을 거야 허물을 벗다가 포기한 뱀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간다 산에서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는 뱀 허물을 보았다 너는 너로부터 잘 달아났구나! 눈물로 반성하며 허물을 벗고 다른 허물을 찾아가는 나여 아침에 벗은 허물이 저녁이면 귀신같이 몸을 찾는다 -전문(p. 107) ------------------- *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에서 * 윤진화/ 2005년 ⟪동아일보⟫로 ..

벚꽃 한생/ 고영섭

벚꽃 한생 찰나의 행복 고영섭 벚꽃 터널 아래 서면 황홀합니다 예닐곱 때 장독 뒤에 숨었다가는 술래 잡던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스무 살 때 전우를 만나기도 하죠 벚꽃 화엄 아래 서면 극락입니다 서른 해 전 이웃을 만나기도 하고 마흔 해 전 동료를 만나기도 하고 쉰 해 전 벗들을 만나기도 하죠 아아, 눈꽃 가득 피운 나무 아래 서면 또 한 생이 찰나처럼 흘러갑니다. -전문(p. 123)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고영섭/ 1989년『시혁명』 & 1995년『시천지』로 작품 활동 시작, 1998~1999년 월간『문학과창작』추천완료, 2016년『시와세계』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몸이라는 화..

서울역 7017, 휘파람을 부세요/ 윤진화

서울역 7017, 휘파람을 부세요 윤진화 의정부 이모가 죽었다. 무당은 신이 자기를 버릴까 봐 또 다른 신을 찾아다녔다. 제일 오래된 신의 끈을 세게 묶고 산책을 했다. 피아노에 있어야 할 건반을 이가 빠진 노인이 들고 있었다. 르네상스식 서울역은 옛것이었다. 바로 옆에 낡은 신을 모아서 만든 슈즈 트리(shoes tree)가 있었다. 옛 서울역만큼이나 높게 쌓아 탑을 이뤘다. 사람들이 냄새나고 더러운 신들을 치워달라며 민원을 넣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 3악장이 파도쳤다. 나는 선녀보살 이모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깊은 바다에서 자맥질을 끝내고서야 휘이익 숨비소리 내는 해녀처럼. 부채는 없었지만 바람은 적당히 불었다. 정수리로 전기가 찌리릿 올랐고, 온몸이 뜨거워서 신을 벗었다. 시원하고 친절한 신발가..

두 밤/ 이계열

두 밤 이계열 두 밤 자고 와 병중이신 아버지가 손가락 두 개를 쫙 펼치시며 하신 말씀이다 두 밤 자고 와 홀로 남은 어머니가 어깨를 들썩이며 하신 말씀이다 길 떠나기 전, 돌아오고 돌아오던 길이다 -전문(p. 97) ----------------- *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에서 * 이계열/ 2003년『심상』으로 등단, 시집『이쪽이 저쪽을 아는 마음』『그 자리에 놓아두자』등

헌집/ 김현지

헌집 김현지 이른 아침 나팔꽃이 담장을 넘어와 안부를 묻는다. 밤새 안녕하시냐?고 키 큰 해바라기도 목을 빼고 들여다본다. 오늘도 별일 없으신지요? 산기슭 외딴 집 지붕 끝 난간에 까치 한 마리 고개 갸웃 내려다보며 묻는다 낼 모레가 추석인데 피붙이들 소식은 날아오는지? 궁금한 게 많은 길고양이들, 기웃기웃 문틈을 들여다보고 있는 -전문(p. 110)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김현지/ 경남 창원 출생,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으로 등단, 시집『연어일기』『꿈꾸는 흙』『그늘 한 평』『포아풀을 위하여』『풀섶에 서면 내가 더 잘 보인다』『은빛 눈새』등, 포토 에세이『취우산에서 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