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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대상화'와 '대상화하지 않기' (부분)/ 이병철

'선한 대상화'와 '대상화하지 않기' (부분) 이병철/ 시인 · 문학평론가 지난해 출간된 시집들 중 가장 의미있는 작업으로 이산하의 『악의 평범성』(창비)을 꼽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악의 평범성'은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장교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다. 패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정체를 감춘 채 리카르도 클레멘테라는 이름의 자동차 수리공으로 살다가 10년 만에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게 붙잡혀 예루살렘 법정에 세워졌다. 아이히만 아닌 클레멘테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누구에게나 성실하고 선한 이웃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

한 줄 노트 2024.03.09

순교의 계절/ 이화은

순교의 계절 이화은 오늘이 그날인 듯 한꺼번에 꽃이 무너져 내린 나를 밟고 가라 떨어져 누운 꽃잎 꽃잎 꽃잎 신의 얼굴을 밟아야 하나 살아야 하나 시간의 칼날이 목을 겨눈다 순교와 배교 사이를 왕래하는 동안 벚나무 아래로 또 한봄이 간다 -전문(p. 399) --------------------------- * 2023 한국시인협회사화집 『시와 종교』에서/ 2023. 12. 22. 펴냄 * 이화은/ 199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절정을 복사하다』『미간』『절반의 입술』외

바람 부는 밤 외 1편/ 강인한

바람 부는 밤 외 1편 강인한 스스로의 그림자를 거두어 들고 이 바람에서 저 바람으로 건너가는 것들. 시간이 시간을 풀어주듯 훌훌 떠나갔다. 맨발인 채, 비로소 그는 떠나갔다. 오늘 그는 불 속으로 걸어갔다. 단 한 사람의 죽음을 만나기 위하여 진실한 빛이 내리고, 영원한 장소 크고 목마른 하늘이 넝쿨져 강물처럼 흐르는 곳 그곳을 향하여 홀로 걸어갔다. 얼마나 망설였던 것인가. 몇 번이고 뒤돌아본 인간의 마음 쓸쓸히 마지막 문을 닫던 밤. 겨울 유리창 앞에서 입김 불며 어둠을 내다보던 아, 바람 부는 프로필.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떠나갔다. -전문(p. 56-57) ---------------------- 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초식동물에게도 산다는 것은 본능, 적응하는 건 삶의 ..

장미열차/ 강인한

장미열차 강인한 부드러운 슬픔을 친구의 어깨처럼 기대고 그대는 나직나직이 울고 싶은 게지. 퀸 엘리자베스 장미의 이름으로 피어있는 오늘. 겹겹이 여민 분홍 베일 사이로 향기는 흐른다. 오랜 옛날을 바로 어제처럼 기억하며 내가 타지 않은 열차를 떠나보낸다. 잠들지 못하는 그대에게 보내고 또 하염없이 열차를 떠나보낸다. 작은 장미 정원에서 밤마다 피고 지는 꿈 한 닢 두 닢 헤아리는 그대에게 오월에 떠나보내는 장미열차. -전문- 대담> 한마디: 박성현_선생님께서는 이가림 시인과 아주 오랜 인연을 맞고 계십니다(※ 2016. 3. 18. 서울의 인사동에서 만나 두 시인의 대담 기록). 이가림 시인이 1966년 ⟪조선일보⟫로 등단하셨으니, 두 분의 인연은 각별할 것 같습니다. 자료를 수집하다 두 분이 같이 찍은..

고대의 향가 현대의 향가(부분)/ 고영섭

中 고대의 향가 현대의 향가(부분) 고영섭/ 시인 · 문학평론가 ·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前略···) 고려의 혁련정赫連挺은 균여均如(932-982, 50)의 「보현십원가」 11수를 『균여전』에 수록하였고, 일연은 『삼대목』 내지 당시까지 전해지던 향가를 선별한 14수를 『삼국유사』에 담아내었다. 그 결과 향가는 25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향가연구가인 김영희는 향가 창작법 형식에 따라 「공무도하가」「황조가」「구지가」「비형랑가」「지귀가」「요석공주가」「해가」「지리가」「판니가」「완산동요」, 그리고 고려 예종이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왕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인 장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을 기려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 1수까지 포함한 향가 11곡 발견 보고서를 통해 향가를 36수로 집..

권두언 2024.03.07

극진한 안부 외 1편/ 조윤주

극진한 안부 외 1편 조윤주 엄마는 북으로 갔다는 당신 언니에 대한 생사를 몹시 궁금해했다 아옹다옹 함께했던 시간들을 곱씹으며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탄식을 자아내는 날들이 많았다 대한적십자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놓고 엄마가 내뱉는 속 타는 한숨은 천 개의 불을 살가죽에 엎질러 놓고 고문을 견뎌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60여 년째 여전히 생사를 확인 중이던 그때 소식이 찾아왔다 "북에 계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며 성사된 2014년 2월 21일 이산가족 상봉 날에 당신의 언니는 한 달 전 고인이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며 금강산호텔 북에서 내려온 조카들을 껴안고 통곡했다 눈물 콧물로 서로 얼굴을 비비며 겨우 받아 든 당신 언니의 사진 한 장 낯선 노인이 낯선 노인의 사진을 오래도록..

모성의 안쪽/ 조윤주

모성의 안쪽 조윤주 두려워 마라! 코브라가 알을 품고 있는 어미 닭을 공격할 때 어미는 날개를 한껏 부풀려 그 목을 쪼더라 온전한 생은 주변 모든 것들의 눈을 깨우고 생까지 덥혀야 가능한 것 하여, 어미는 코브라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누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시간이라고 했느냐 질기고 질긴 모성애로 시간은 뼈가 되느니라 너의 몸을 지탱하는 것은 거룩한 사랑이다 날개를 들여다보아라! 어미의 물리고 베인 상처 위에서 너의 맥박은 뛴다 코브라가 약자의 둥지를 떠난 적 있더냐 사방이 날름거리는 혀와 독이다 그래도 두려워 마라! 두 날갯죽지를 열면 보송보송 솜털 가득한 체온의 방이다 이 지상에 사랑으로 도태되는 비행飛行도 있나니 꼬끼오 꼬꼬꼬꼬 돌고 돌고 돌아도 마당 한 바퀴의 생 새털 같은 날들을 새털처럼 품고도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5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5 정숙자 화분에 갇힌 난초가 꽃을 피웠습니다. 말 못 하는 풀임에도 제 그리운 데를 바라보느ᄅᆞ 문 쪽으로 목이 휩니다. 꽃피움만이 그의 언어요 자유이거니, 향기는 그의 날아가고픈 마음이요 숙여 핀 꽃은 안길 데 없어 되돌ᄋᆞ온 메아리임을…, 불립문자로 읽었습니다. (1991. 9. 26.) 아침이면 유리창 가득 눈 맑은 햇빛이 웃어줍니다 일흔 넘도록 자획만을 애끓은 이가 굶지도 않고…, 먼 골에 묻히지도 않고…, 이로써 족합니ᄃᆞ 당신께 드릴 오늘의 꽃은 ‘이로써, 이로써 족하옵니다’ -전문(p. 75-76) ----------------- * 『시결』 2024-봄(창간)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5/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5 정숙자 화분에 갇힌 난초가 꽃을 피웠습니다. 말 못 하는 풀임에도 제 그리운 데를 바라보느ᄅᆞ 문 쪽으로 목이 휩니다. 꽃피움만이 그의 언어요 자유이거니, 향기는 그의 날아가고픈 마음이요 숙여 핀 꽃은 안길 데 없어 되돌ᄋᆞ온 메아리임을…, 불립문자로 읽었습니다. (1991. 9. 26.) 아침이면 유리창 가득 눈 맑은 햇빛이 웃어줍니다 일흔 넘도록 자획만을 애끓은 이가 굶지도 않고…, 먼 골에 묻히지도 않고…, 이로써 족합니ᄃᆞ 당신께 드릴 오늘의 꽃은 ‘이로써, 이로써 족하옵니다’ -전문(p. 75-76) ----------------- * 『시결』 2024-봄(창간)호 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공검 & 굴원』 외, 산문집『행복음자리표』 외

격세유전의 문화적 밈 혹은 '가을 문명'의 한 소식(부분)/ 정효구

격세유전의 문화적 밈 혹은 '가을 문명'의 한 소식(부분) 정효구/ 문학평론가 · 충북대 교수 (···前略···) 2. '현대 향가'로 몸을 바꾼 '진화사'의 한 사건 호모 사피엔스인 현생인류에게 진화는 생물학적 차원과 더불어 문화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여 널리 알려지고 놀라움이 섞인 공감 속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된 '주체'로서의 유전자의 꿈과 욕망과 권력에 대한 설명은 인간들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자아의식과 주체의식을 무색하게 만든 획기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도킨스의 유전자 주체 이론은 인간의 자아의식이야말로 인연법에 의하여 가설된 '의식'의 형태에 불과할 뿐 '자아'란 본래 없는 것이라는 불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