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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거울/ 강명수

청동거울       전주 국립 박물관에서      강명수    지리산 능선을 휘돌아  완주, 장수, 임실, 남원의  기운 역사  소용돌이 늪을 지나서   수많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유리관 속에  청동 알이 앉아 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의 힘으로  백성의 안위를 기원했을까?   천지인을 담아 놓은 가야의 숨결   서 있는 산이 무릎 꿇고  알집 속에 가둬둔 왕조의  압축 풀기를 기다린다     -전문(p. 127) -------------* 『미래시학』 2024-여름(49)호 에서 * 강명수/ 201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법성포 블루스』

완창/ 마경덕

中       완창      마경덕    산굽이를 돌아온 계곡들  갈래갈래 물길이 만나 철철철 음역을 높인다  서로서로 등 떠밀며 웅덩이에 주저앉은  물의 엉덩이를 끌고 내려간다   저 아래 절창이 있다  물의 비명이 자욱한 해안폭포가 있다   번지점프를 앞두고 밀어붙이는 투명한 채찍들, 등짝을 후리는 소리에 물의 걸음이 빨라졌다   개울에서 꼼질거리던 물의 애벌레들  하얗게 질려 폭포 끝에서 넘어지고 처박히더니,   일제히 우회를 하고 주저없이 바다로 뛰어든다   굽이굽이 긴 노래  완창이다   피를 토하며 득음을 한 명창도 있다     -전문(p. 89)  -------------* 『미래시학』 2024-여름(49)호 에서 * 마경덕/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신발론』『글러브 중..

탭댄스/ 한정원

中       탭댄스     한정원    모스 부호다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다  글자들이 튀어 오르듯  암호처럼 빠르고 짧게, 세게, 약하게  빗방울이 되어 코끝을 부딪친다  쇠붙이를 박은 언어들은 ㄸ, ㅌ, ㅎ, ㄲ,  흩어졌다가 모였다가 공중돌기하다가  흑백의 파편을 뿌린다  추위를 견디려고 폴짝폴짝 뛰는 추운 나라 사람처럼   허공은 터졌다가 다시 봉합된다  캐스터네츠의 파열음  착지하는 순간,  바닥을 치는 소리 듣는다  언제나 그렇듯   타악기처럼 받아줄 울음의 공명이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광야를 질주한다, 고백한다, 담을 넘는다  넘어진다, 깨진다, 호명한다   모스 부호의 비밀을 벗어난 스팽크, 셔플  발과 구두 사이  발가락 끝과 발뒤꿈치 사이  한 생애가 엇박자로 이어진다   울..

한 시대의 천재 문장가 이규보와의 가상 인터뷰(발췌)/ 김혜천

한 시대의 천재 문장가 이규보와의 가상 인터뷰(발췌)       - interviewee: 이규보(고려 1168-1241, 73세)     - interviewer: 김혜천(시인, 다도인문강사)    한 시대를 천재 문장가로 풍미하다 강화 길상면 징강산에 누워계신 당당하고 호방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시 쓰며 술 마시며 고려를 살다간 천재 시인 이규보 선생을 찾아뵈었다.  수많은 저서 중에서도  『동국이상국집』 53권은 8백 년 뒤에까지 남겨져 고려의 역사, 문화뿐 아니라 깊고 넓은 시관과 사상 그리고 고려시대의 다양한 생활상과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내와 자식 생각에 노심초사하고 권력 앞에서 허리도 굽신거릴 줄 아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러면서도 평범한 이웃 아저씨 같은 선생의 인간..

대담 2024.07.27

그녀의 주름치마는 누가 접었을까/ 문봉선

그녀의 주름치마는 누가 접었을까      문봉선    새도우를 바르고 새처럼 새쁜새쁜  마지막 마스카라로 마무리는 굿  새처럼 새쁜새쁜 나의 애마를 부르렴  충무로로 가자   말을 타듯 천방지축 날뛰지 말고  엉덩이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땐 품위를 지키렴  사쁜시쁜 연미복은 날아갈 듯 가벼워  탈의실 같은 건 없어도 좋아  아직 야성이 넘치니까  간이테이블에 걸터앉아   커버력 좋은 햇발 한 줌  주름진 얼굴에 비비면  각선미가 돋보이는 청춘이 더욱 빛나거든  금빛 망사 스타킹에 어울리는  주름치마는 분홍이어도 괜찮아  과거와 현재, 추억을 갈아 넣어  펼쳐질 미래는 핑크빛으로 빛날 테니까   조명이 찬란한 충무로 파랑새 극장  그 꼭대기로 데려다 줘  십자가 위  2막 8장 구겨진 보름달을 펼쳐보인다  ..

와디/ 홍은택

와디     홍은택    사막에도 강이 흐른다  우기에만 넘쳐흐르는 강 소노라 사막에서 일 년을 살았다 선인장 희고 노란 꽃이 피고 오래도록 해가 졌다 달 없는 밤 별똥별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 몸에 가시별로 박혔다  붉은 먼지바람으로 떠돌던 나바호족 영혼이 허파 꽈리 깊숙이 스며들었다. 뭔가  기둥선인장 물관을 타고 바닥 드러낸 강이 무감하게 흘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상형문자 새겨진 암벽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은 것도 납작 엎드린 흙집들 우는 소리가 들린 것도 이미 사막이 된 내 몸속 와디가 마르고 흐르기를 되풀이하는 것도     -전문(p. 248)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홍은택/ 경기도 광주 출생, 1999년『시안』으로 등..

도원기/ 한소운

도원기      한소운    무릉리와 도원리의 초대를 받았다   도화를 보려고 달려간 도천*  꽃숭어리 절반은 무너졌고  절반은 가파르게 흔들리는데  꼭 나를 닮았다  독백처럼 웅얼거리는 바람소리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자리   그대라고 쓰면  눈물이 마침표를 찍는다   첫새벽 이슬의 문장으로 편지를 쓴다  편지가 닿기도 전에 아침이 오고  밤새 머리맡을 떠돌던 별자리도  글썽이다 돌아간 텅 빈 하늘   복숭아꽃 강둑을 걸어 봐도  별빛 내려앉던 마당가를 서성여도  당신이 오지 않으면 꽃이 핀들 무슨 소용  무릉도원은 어디에도 없다     -전문(p. 241-242)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도천길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한소운/ ..

잠자리 시에스타/ 최금진

잠자리 시에스타      최금진    잠자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누가 이 외투 속에 갇힌 몸을 열어줄 것인가  꽃들은 혀를 내밀고 헐떡인다  오후는 제 무게만으로 무거워지고  그는 공중에 버려져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밖에  살 것인가, 뛰어내릴 것인가, 깨어나지 않도록  잠 속에 날개를 결박하고  죄수처럼 웅크릴 것인가  잠자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동안  순식간에 잠이 왔다 가고  잠은 어느 것에도 기대하는 바가 없다     -전문(p. 235)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최금진/ 2001년 『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 시인상, 시집 『새들의 역사』 외

식탁/ 최선

식탁      최선    식탁에게는 누가 밥을 차려줄까   새벽 5시에 가장을 불러 앉히고  나에게는 모닝커피 한잔을 건넨다   숟가락과 밥그릇 부딪는 소리로 허기를 달래는 식탁  그 많은 음식은 제몫이 아니다   노모가 절반을 흘린 밥도  금세 행주가 훔쳐 달아난다   사각의 모서리로 버티는 식탁  가끔 옆구리를 찌르는 것은  허기진 속 알아달라며 내부 비밀을 발설하는  그의 습관성 투정이다   가끔 시장기를 참지못해  발밑에 숨긴 몇 개의 밥알들이  사금파리처럼 날카롭게 발바닥을 찌르기도 한다   귀퉁이에 민들레 한 송이  꽂아 주면  머리핀처럼 반짝이며 근사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한 때 친척집에 얹혀 살 때가 있었다  때를 놓친 귀가길에는  대문 안쪽에서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  발뒤꿈치..

민초/ 윤명규

민초      윤명규    베어져 스러지는 풀들을 보라  갈가리 찢긴 조각들이 하늘로 솟구친다  다른 풀들의 품 안에 떨어져 안기고  그들을 껴안은 풀들도  다가올 운명의 무게만큼 허리를 꺾는다   어린 멸치 숨결 같은 것들  결코 생을 구걸하는 법이 없구나  보리밥처럼 눌어붙은 울혈만이  소리 없는 비명을 털고 있다   이름 모를 들꽃과  개고사리, 나팔꽃들도 섞여  의연히 죽음의 칼날을 기다린다   목을 쑥 뽑아 잘리면서도  풋풋한 풋내를 뿌리며  감싸듯 받아주고 그도 스러지고  우는 듯 웃는 듯  몸 조각을 나부끼는  죽어도 죽지 않는 저 이름들   고사리 손 잘라지고  나팔수 사라지면 그 누가 나팔 불어  새벽을 일으킬까     -전문(p. 80-81)   ---------------* 군산시인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