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추
이현승
최근에 「양상추」라는 시를 썼다. 나는 최근에 가늘고 희미한 것에 대한 감식안을 키우는 데 큰 희열을 맛보는 중이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와의 한 토막 전화 통화가 계기가 되어 쓰게 된 시이다. 고향에서 홀로 지내시는 노모와 하루 한 번 정도는 통화를 하는데, 노모에게 들은 말 한 토막이 내게 시적인 정념을 주었다.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해서 뭐하시느냐고 여쭸더니 어머니는 삼동이 지나가고 제법 볕이 다사한 날이라고 인근의 오일장에 가서 양상추를 하나 사 오겠노라고 포부를 전했다. 다섯 남매를 낳아 키우던 억척스런 어머니는 어디 가고 지금 어머니는 팔순의 노인이 되어 당신 몸 하나를 건사하는 것도 힘에 부쳐 하시곤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장에 가면 양상추를 진짜 하나 사서 들고 돌아오시는데, 오래 보아 친한 상인이 어머니께 덤으로 하나 더 얹어 주어도 어머니는 양상추 하나의 무게가 짐스러워 마다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게도 무게지만, 어머니의 식사량이 적어 욕심내 봤자 쓰레기만 자초하는 꼴이다. 이런 처지가 되고 보니 머릿속으로 버스 타고 삼사십 분 거리에 있는 장에까지 굳이 가서 양상추를 하나 사 돌아오는 노모의 일과를 헤아려 보게 되었다. 시간에 쫓기는 젊은 사람 같으면 쿠팡에 새벽 주문을 넣거나, 집 앞에 즐비한 마트에 가서 사 오면 그만일 이 사소한 일에 온 기력과 정성을 다 들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내 편에서는 작은 '묵화' 같았다. 이 역시 「양상추」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그 묵화의 언저리에 있는 작은 일화도 있다. 이번엔 어머니 편에서 내게 뭘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시기에 원고를 쓰는데 잘 안 되어 마른 침만 삼키고 있다고 했더니 노모는 아들이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그러는 것이다. "아들이 하는 일이 그 얼마나 중한 일이데. 그게 그리 쉽게 되면 몫이 적지~." 희미하고 가는 것일지언정 거기에 도사린 삶의 무게와 깊이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 최근에 내가 맛보는 재미이다.
-전문-
▶직업으로서의 시인(발췌) _이현승/ 문학평론가
감가상각 혹은 중력가속도// 내가 아는 한 가장 근로 기간이 짧은 직업은 시인이다. 나이가 지긋해서까지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본 일이 거의 없고, 간간히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대부분은 '총량의 법칙'으로 이해 가능한 경우이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사업의 시간 자체만 보면 사람들의 총량이 비슷하다는 것. 더러 나이가 들어도 계속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이 있지만, 이런 사람들조차 최상급의 폼을 유지한다는 것이지, 세상에 한 줌의 파문을 던지는 힘찬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시를 쓰는 일 자체가 힘들고(원래도 한순간의 환희와 맞바꾸기 위해서 고통스럽고 긴 환멸을 견뎌야 하지만) 점점 힘에 부치지만, 그럴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파격의 유혹을 잘 참고 희미한 그 시를 더 분명하게 붙잡는 일이 아닐까 한다. 삶의 시간이 완만해진다면 그 완만함에 잘 녹아 가면서, 삶이 가파르다면 가파른 대로 유연하게 '보고 싶다.' 어쨌거나 희미하고 가느다란 창조의 공평함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외 없이 요즘 시는 도대체가 무슨 말이지, 요즘 젊은 시인들은······ 하고 군말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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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볼, 그밖에// 최근 광주FC의 이정효가 화제다. 그는 소위 라인을 끌어올리고 공간을 만들면서 팀을 화끈하게 밀어붙이는 축구를 한국에 돟입해 엄청난 팬덤을 모으는 중이다. 한국형 무리뉴 감독의 일관적이고 자신만만한 축구(를 일러 정효볼이라 한다) 덕분에 축구가 감독의 지분이 얼마나 큰 스포츠인지를 새삼 배우게 되었다. 게다가 최근의 아시안컵 4강과 함께 계약 해지된 축구 국가대표팀의 위르겐 클린스만의 무책임과 방임이 대비되면서 이정효 감독을 향한 관심은 더욱 뜨거워졌다. 우리의 시단이 지금 정효볼처럼 뜨겁진 않지만, 여전히 쟁쟁한 신예들의 시와 함꼐 부드럽고 힘차게 흘러가고 있음을 본다. 눈을 크게 뜨고 신예들의 시를 읽는 일, 직업으로서 사는 일 중의 하나. (p. 시 128/ 론 127-128 ·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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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4-봄(32)호 <serial / 직업으로서의 시인 1회> 에서
* 이현승/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2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활이라는 생각』『대답이고 부탁인 말』, 저서『얼굴의 탄생 한국 현대시의 화자 연구』『김수영 시어 사전』(공저), 『김수영 시어 연구』(공저), 『현대시론』(공저), 『이용악 전집』(공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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