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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접/ 장수라

시접      장수라    끝내는 방식은 모두 슬프다  몸을 바꿀 수가 없어서  옷 속으로 들어간 그녀가 웅크리고 있다   봄비 때문이 아니었다  you're magic이라 써진 봄을 입고  횡단보도를 웃으며 뛰어가는 긴 머리 아가씨  벚꽃 한 송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른 세계로 가고 있다   그 웃음에서 운명을 꿈꾸었던 시간을 보았다  삶의 변수가 올 줄 아직 모르는 나이  변수를 예감할 때 누구나   조금씩 시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분의 천 조각을 내어 수선해 보아도  겨드랑이 옆구리 사타구니 우리 몸 구석구석  곡선의 결을 따라 다른 온도로 숨어 있는 마음들  변수를 둔 상태는 불투명하다   시접을 모두 써 버려 감당할 여백이 없을 땐  자신을 통째 버리거나 품을 떠나보낸다  몸에 맞지 않는 ..

슬픈 아일랜드 15/ 강성철

슬픈 아일랜드 15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본 슬픈 아일랜드    강성철    맬서스가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라고 투키디테스 면전에서 인구론을 펼치자, 고뇌에 찬 아테네 새마을운동의 선구자이며, 아테네 제1시민인 페리클레스가 "아들, 딸 구별 없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응수하였다. 이에 스파르타가 용맹한 전사를 배출하기 위한 남아선호사상에 배척된다며, 여성 전사 아마조네스를 몰아내고 오물 풍선과는 별도로 "인구는 산술급수적으로,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라는 해괴한 전단을 아테네로 살포하였다. 이에 더해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국공國共 내전 중지와 항일연합전선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생산 장려책으로 맬서스의 인구론에 ..

시목문학 제6집/ 여는 글 : 최영화

시목문학 제6집, 여는 글     최영화/ 시목문학회 회장    각각 움켜준 물의 모양   떄론 솟구치고  때론 몰아치다  깊어진 10년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앞으로도 뚜욱  물이 되어     02024년 7월0   시목문학회 회장 최영화    - 전문(p. 5)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최영화/ 2017년『문예춘추』 & 2022년 『상징학연구소』로 등단, 시집『처용의 수염』『땅에서 하늘로』

권두언 2024.09.19

세기의 바람둥이로 일컬어지는 카사노바/ 조명제

세기의 바람둥이로 일컬어지는 카사노바     조명제/ 문학평론가    호색한의 전형, 세기의 바람둥이로 일컬어지는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 1725-1798, 73세) 백작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드보다 조금 먼저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다독하며 수학, 언어, 철학에 큰 재능을 보여온 그는 청소년 시절 사제 수업을 받기도 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돈더미에 올라 권력 있는 귀족이 되어 여성 편력의 길로 접어들었다. 카사노바의 회고록 『카사노바 나의 편력』에 따르면, 그는 73년 간의 생애에서 고향 베네치아는 물론 로마, 파리 등 유럽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다니며 39년에 걸쳐 122명의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근육질에 180미터의 멋진 외모(?)를 지녔던 18세기..

한 줄 노트 2024.09.18

일침/ 이희승

일침     이희승    고래를 잡는다 얼마나 잡았냐고 땅 위에 있는 시간보다 바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지 땅 위에 서면 멀미가 나지  돌고래 따윈 잡지 않아 귀신고래만 잡지 참고래 말이야 참고래는 분기를 내뿜어 한눈에 알 수 있어 엔진을 꺼야만 해 달아날지 모르니 노를 저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놈이 눈치채니까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일 즘 작살포를 조준하는 거야 심장부를 정확하게 내리꽂지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이 성난 파도 같지 배가 뒤집힐 정도야 난, 딱 작살 하나만 꽂지  장수경이란 놈이 문기를 일으킬 텐데 오힐 반들거리며 살짝 물 위에 비치는 거야 숨을 쉬려 떠올랐던 거지 엔진을 껐어 하지만 놈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지 놀란 건 나였어 엉겁결에 작살포를 당겼지 밧줄이 풀리기 시작했어 한없이 ..

벽과 벽 사이/ 양문희

벽과 벽 사이       울란바토르 샹그릴라호텔      양문희    열려 있던 창이 닫히는 것을 본다   급히 날아든 새와 빠져나갈 새를 위해 맛있는 것들이 많다  오렌지 맛 사탕 쌓여 가고 내 강아지 있고 초코파이가 있고 오징어 땅콩이 있고  창밖으로 삐져나온 맛집 카탈로그가 있다   눈뜬 강아지, 닫힌 창을 향해 짖는다   빠져나간 빈방엔 새의 깃털이 쌓이고  두고 간 행선지 팸플릿에 그려진 붉은색 동그라미, 몽골 초원에서 밤하늘 삼태성 찾기다 고비사막에서 낙타 타고 울란바토르 가기다   오래전 그와 가방을 샀다 시옷으로 시작하는 가방의 메이커가 조금 낯설긴 했지만 레드카펫이 깔린 곳을 따라 구르기엔 충분한 바퀴였으니까 객실로 가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고장 나기 쉬운 것도 바퀴였으니   그렇게 복도..

에로티즘 문화와 문학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조명제

에로티즘 문화와 문학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조명제/ 문학평론가      마광수(서울. 1951-2017, 66세)는 유고 소설집이 되어 버린 『추억마저 지유랴』(어문학사, 2017)를 출판사에 넘기고,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에 본디의 제목을 바꾸어 '추억마저 지우랴'로 해 달라고 출판사에 연락한 것으로 전한다. 28편의 유고소설은 작품들이 대체로 짧은 편이지만, 자전自傳과 허구의 경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송희복, 「가버린 작가 남은 유고집」), 『마광수 시대를 성찰하다』(2019, 45쪽). 이 단편소설집 중의 「마광수 교수, 지옥으로 가다」는 마광수 자신의 가상적인 사후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p. 37)    에로티즘 문화와 문학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법관들이 에로티..

한 줄 노트 2024.09.17

조명제_변태적 상상력과 창조적 개성···(발췌)/ 가자, 장미여관으로 : 마광수

가자, 장미여관으로      마광수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 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필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없는 보디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 저쩌구  세계의 운명이 자기 운명인 양 걱정하는 체 주절주절  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  가자, 장미여관으로!   블루투스는 싫어 디스코는 더욱 싫어  난 네 발냄새를 맡고 싶어, 그 고린내에 취하고 싶어  네 뾰족한 손톱마다 색색가지 매니큐어를 ..

왜 문학을 하는가(부분)/ 강경호

왜 문학을 하는가(부분)      강경호/ 문학평론가 ·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前略)  필자는 동료 문인들로부터 보내오는 작품집을 받는다. '참으로 많은 책이 생산되고 있구나'를 체감하면서도 '안됐지만 왜 이렇게 쓸모 없는 책들이 생산될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더불어 내가 누군가에게 보낸 책이 고물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서 '함부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쉽게', '습관적', '알지 못하고' 등의 의미로 읽힌다. '쉽게' 글 쓰는 것은 '어렵지 않게'라는 뜻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라고 읽는다. 아는 만큼만 글을 쓴다는 것을 말한다. '습관적'이라는 것은 관습적으로 글을 쓸 때를 지적한다. 이는 '자동적'인 글쓰기를 하는 ..

권두언 2024.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