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학을 하는가(부분)
강경호/ 문학평론가 ·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前略)
필자는 동료 문인들로부터 보내오는 작품집을 받는다. '참으로 많은 책이 생산되고 있구나'를 체감하면서도 '안됐지만 왜 이렇게 쓸모 없는 책들이 생산될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더불어 내가 누군가에게 보낸 책이 고물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서 '함부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쉽게', '습관적', '알지 못하고' 등의 의미로 읽힌다. '쉽게' 글 쓰는 것은 '어렵지 않게'라는 뜻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라고 읽는다. 아는 만큼만 글을 쓴다는 것을 말한다. '습관적'이라는 것은 관습적으로 글을 쓸 때를 지적한다. 이는 '자동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는 앞에서 한 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옛날 천재적인 문학인들이 즉흥적으로 글을 썼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충분한 공부가 된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천재'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노력과 수고가 없는 대가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훌륭한 문인들은 밤새 고치고 또 고쳐서, 그래서 많은 사색의 결과로 좋은 글을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수백 종의 문예지에서 대량 상품 찍어내듯 생산한 문인들이 넘치는 시대여서 자질이 부족한 문인이 많아진 것은 문예지 발행인과 이에 호응한 문인들의 헛된 욕망 탓이다. 쉽게 문인이 되어 질이 떨어지는 작품들을 써내고 있기 때문에 둑자들이 문인을 우습게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문단의 폐해는 이미 고질병이 되어 문학이 오히려 공해가 된 부분도 없지 않다. 문학작품이 작가의 정서나 욕망의 배설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문학인은 본래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 야성을 필자는 '진보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문학이 늘 독자들의 상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데도 많은 문학인이 창조적인 측면에서 게으르고 보수화되어 버렸다. 자신이 보수화되었다는 것도 모르는 문인이 태반이다. 여기에서 '보수'와 '진보'는 정치성을 말하지 않는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세계를 읽고 인간의 삶과 자연, 그리고 사물을 참신하게 인식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p. 23-24)
(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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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4-7월(665)호 <권두언> 에서
* 강경호/ 1992년『문학세계』로 평론 부문 & 1997년『현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문학평론집『휴머니즘 구현의 미학』『서정의 양식과 흔들리는 풍경』『문학과 미술의 만남』외, 미술평론집『영혼과 형식』, 연구서『최석두 시 연구』, 시집『언제나 그리운 메아리』『알타미라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함부로 성호를 긋다』『휘파람을 부는 개』『잘못든 새가 길을 낸다』, 소리를 주제로 한 에세이집『내 마음의 소리』, 기행 에세이집『다시, 화순에 가고 싶다』『역사와 생명의 고을, 무안』『화순누정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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