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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윤유점

우화     윤유점    온 동네 소란하게  달 보고 짖던 견공  들창에 솟아오른  슈퍼문에 소원 빈다   삼킬 듯 돌연한 마음  취기 오른 행복감   끝없이 찬양하는   눈동자 번뜩이고  가면 쓴 얼굴들이  군림하는 붉은 세상   밤사이, 마법에 걸려든  성스러운 팽나무  싸늘하게 죽어 간다     -전문(p. 67)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윤유점/ 2007년『문학예술』로 & 2018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내 인생의 바이블코드』『귀 기울이다』『붉은 윤곽』『살아남은 슬픔을 보았다』『영양실조 걸린 비너스는 화려하다』『수직으로 흘러내리는 마그리트』

발자국이 흐느끼던 날/ 박장희

발자국이 흐느끼던 날      박장희    부리를 가슴에 묻고 외다리로 밤을 지새운 난 짓무른 눈으로 사소한 불일치에도 생각을 덧질한다 가벼워진 뼛속 공중에 뻗은 나뭇가지, 어둠의 모서리 긴꼬리에 회색빛 낮은음자리표로 앉는다 적막은 깃털만큼 겹겹이다   나의 부리와 꽁지는 점점 여위어 녹을 줄 모르는 얼음 위에 싸늘히 붙고, 침믁으로 깊어지던 악보는 높은음 쓸쓸한 박자로 깃털마다 스며들고, 훤한 햇살 아래지만 온통 검회색이다 적막은 찢을 수도 칼로 도려낼 수도 불로 녹일 수도 없는, 날개가 있어도 비상할 수 없고 허공이 있어도 자유가 없다   핑크 난 풍선 찢어지고 무너져 내린다 목 뜯기고 뽑힌 깃털 푸르죽죽 울긋불긋, 목 안에서 모래바람 회오리친다 어떤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어떤 풍경도 바라볼 수 없고..

육식 습관/ 추성은

육식 습관     추성은    티라노사우루스의 천적은 홍학  시를 쓰는 것과 제목을 쓰는 건 아주 다른 일   마음은 몸을 가지고, 손발의 물성을 가지고 객원으로 찾아오는구나   먼지, 태초의 마음은 먼지였을까, 먼지 이전의 모래. 모래자갈은 한때 돌이었고 돌은 한때 화석이었다고, 먼 옛적 공룡에게도 깃털이 있었다는데, 화석은 발견되었다는데, 공룡의 심장은 인간의 심장을 닮았다는 것도, 홍학에게 쪼아 먹히는 공룡 심장, 그런 거 전부 당신이 알려 준 마음이었지   당신은 내가 시를 쓰기 전  제목부터 짓는 게 나쁘다고  고치라고 했다   가벽과 비계를 세우고 집을 짓는 게 아닌  문부터 세우는 사람  그게 나라고   한 무리의 홍학이 지나간 곳에는  공룡의 뼈와 깃털만 남는다   전시된 모형 공룡 화석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생각하며 시를 버리다/ 최동호

아우구스티누스를 생각하며 시를 버리다      최동호    신에 대한 강한 회의로 경건한 말씀을 전하는  성서를 휴지보다 가치가 없다고 집어 던져 버렸다는   젊은 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떠올리며  나의 시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   나의 시는 그대 한 사람의 마음도 꿰뚫지 못하고  나의 시는 그대 한 사람의 사랑도 얻지 못하고  나의 시에 뒤늦게서야 절망에 빠진다.  나의 시는 종이 한 장 뚫지 못하고  나의 시는 볼펜에서 삐져나와 종이 위에 낙서를 그리고  어두운 수채 구덩이 속으로 사라진다.   나의 시는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하고  나의 시는 종이만 버리고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진다.  한때는 나도 커다란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시는 절망에 빠진 젊은 시절 나를 구해 주었고  나의 시는..

난민/ 채길우

난민     채길우    얼굴만 한 꽃을 틔우고  키를 웃돌 듯 높이 자랐던  수확 앞둔 해바라기들은  가을 폭우에 택없이  쓰러져 버렸다   일으켜 세워  흙을 밟아 주어도 다시  넘어지고 마는 뿌리  얕은 꽃들은 그러나  다음 날 햇살이 비치자   고개 숙인 바닥에서조차  다시 목을 늘어뜨리고  머리를 디밀며 태양을  올려다보기 위해 힘껏  턱을 쳐들었다   좁은 잔발등이 터져  이미 들려 버렸는데도  밑에서부터 썩어 가는 잎사귀에  곱은 어깨가 전부  시들어 뭉개진 채로도    -전문(p. 101)  -------------------  * 『계간파란』 2024-여름(33)호 에서  * 채길우/ 시인, 2013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스스로 웃는 매미』『섬들이 놀다』『옛날 녹..

마카롱 편지/ 이혜미

마카롱 편지     이혜미    기억해? 우린 같은 옷을 입고 캠퍼스를 걸었지 서로에게 얽혀 있다는 약속의 무늬로, 같은 종족이 되어 비슷한 그늘을 얻으려 했어 모르는 표정을 걸칠 때마다 곤란해진 상처들이 쌓여 갔지만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을 한가득 빌려 온 도서관에서 의미의 미로를 헤매다녔지 개기월식이 시작된 오늘을 우주적 마카롱의 날이라고 불렀어 서로의 각도를 겹쳐 어둠을 태어나게 하면 멀리서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지 미루어 둔 과제처럼 남겨진 그늘을 만져 보다 겹쳐지며 하나가 되는 시간을 떠올렸으니까   심장이 자석이라면 떠도는 행성들을 끌어모아 짤주머니에 넣고 외로움의 목록에 익숙한 이름들을 모아 두겠지 투명에 저당 잡힌 무수한 뒷면을 감추고 별 모양의 반죽으로 서로를 기억할 수밖에   그거..

자전거/ 곽효환

자전거      곽효환    옆집 현관 앞에  올해 초등학생이 된다는 이웃집 아이와  아버지의 자전거가 나란히 서 있다  문득 그 무렵 딸아이 민경이가 나와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 쓴 동시가 겹쳐진다             아빠와 자전거를 탄다            아빠가 앞에 가고            내가 뒤를 따른다            아빠의 길이 나의 길이 된다   시를 쓰는 내내 찾아다닌 것이  이 몇 줄에 오롯이 들어 있다  간결하고 명징한 언덕  선명한 비유 그리고  맑고 투명한 마음     -전문(p. 75)  -------------------  * 『계간파란』 2024-여름(33)호 에서  * 곽효환/ 시인, 1996년 ⟪세계일보⟫ & 2002년 『시평』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인디..

송현지_검은 투명(발췌)/ 개구리극장 : 마윤지

개구리극장      마윤지    비오는 날 극장에는 개구리가 많아요  사람은 죽어서 별이 아니라 개구리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언제든 자신의 죽음을 다시 볼 수 있어요  때로는 요청에 의한 다큐를 함께 보고요   주택가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상영 114분  들키지 않고 우는 방법에 관한 재상영 263분   그러나 역시 최고 인기는  새벽녘 같은 푸른 스크린 앞  부신 눈을 깜빡이며 보는 죽음이에요   손바닥을 펼쳐 사이사이 투명한  초록빛 비탈을 적시는 개구리들   우는 것은 개구리들 뿐이지요  이젠 개구리들도 비가 오는 날에만 울지요  의자 밑  인간들이 흘리고 간 한 줌의 자갈  그것이 연못이었다는 이야기   떼어 낸 심장이 식염수 속에서  한동안 혼자 뛰는 것처럼    떨어져 나온 슬픔이  미처..

일단 멈춤/ 박순례

일단 멈춤      박순례    삼십 년 된 장롱을 버렸다  나를 버렸다  이십 년 된 장식장을 버렸다  꿈을 버렸다   왕골 돗자리를 버렸다  추억을 버렸다  매 묵화 병풍을 버렸다  과거를 버렸다   접시를 버리려다 멈춘다  이유식을 먹이던 접시  버리려던 딸아이들이 빙글 돈다   접시를 돌린다  꽃을 따라다니며 엄마 놀이를 하고  애기 오리가 점점 자라  삼지창을 든 오빠와 뒤뚱거리던 오리 궁둥이들  멜라닌 접시에서 아이들 논다   대낮인데 하늘엔 별이 뜨고 달이 뜨고  달콤하게 꿈을 키우던 아이들  접시에서 지금도 뛰어논다   햇살이 접시 안에 듬뿍 안긴다     -전문(p. 50-51)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김도은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김도은    의자는 의자를 보고 있다  의자는 의자를 보는 의자를 외면한다   의자는 등받이가 없다  의자는 의자의 등받이를 내주었다   등이 없어진 의자  등이 있는 의자에 앉는다   의자를 보던 의자 의자를 외면한 의자  그 의자는 무엇으로부터 왔을까      -전문(p. 43)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김도은/ 2015년 웹진『시인광장』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