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오형엽_모티프, 구조화 원리···/ 흉凶으로 지울 수 있는···비트 1 : 신동옥

검지 정숙자 2024. 9. 24. 16:07

 

    으로 지울 수 있는 모든 것  비트 1

 

     신동옥

 

 

  여자 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

  털이 무성한 목덜미를 가진 사냥감을 쫓는 강아지

  엄마가 손 갈퀴로 파낸 들판을 말없이 질주하던 물소 떼

  야전침상 아래서 아빠의 작전 수첩을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

  언덕 너머 바다에서 나온 말 없는 물고기

  어딘가로 끝없이 뻗은 오솔길이 숨긴 깊고 아득한 참호들 

  숲에서 깃을 치며 나오는 발 없는 새떼······

 

  한때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

  출구가 없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주저앉고는

  빠져나올 길을 영영 잃어버려서

  거기다 집을 짓고 산다, 파국이라는 비밀 아지트 속에서

  접선할 방법을 영영 잊어버려서

 

  흉터는 신비한 담장이 되어 비트를 구획했다.

  우리는 꼭꼭 숨어서 침묵으로 저항했다.

  지속 가능한 혁명은 없다.

  사람과 암시의 역사가 쓰이는 방식,

  모든 것들은 가능할 때까지만 지속된다.

  지속하는 매 순간 불가능으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는 것을.

 

  밤낮없이 비트 속에 갇혀서 비로소 하나가 되었지만

  어딘가에서 불을 지피고 어딘가에서 얼음이 언다.

  사주경계하던 눈길을 흩어 그을음을 닦아내고

  유리창 너머를 볼 때의 아릿한 표정들

 

  언젠가 우리는 깊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생긴 피딱지에 십자가 표식을 남기고는

  다른 상처에 깊은 처방을 쓴다,

  언젠가 네 상처가 내 것보다 깊어 아렸다는 걸 가르쳐주려고.

      -전문(제 3시집 『고래가 되는 꿈』 문예중앙, 2016./ p. 86-87)

 

  모티프, 구조화 원리, 인유   몽타주   알레고리/ 신동옥 시의 모티프와 원리 잋 방법론下 (발췌)_오형엽/ 문학평론가

  초반부에 제시되는 파편적 이미지들의 병치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주제 및 기법의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제의 측면에서 가정의 일상사와 자연의 풍경 속에 은폐된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와 승패를 걸고 투쟁하는 전쟁 세계를 탈은폐시킨다. 기법의 측면에서 언캐니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노출시키고 파편적 이미지들간의 충돌과 연결을 통해 충격 효과를 발생시키는 '몽타주'를 구사한다.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특성을 가지는 초반부가 중반부(2-3연) 이후에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중반부 이후에 등장하는 "비밀 아지트" 약자 "비트"는 군사용어로서 '간첩·게릴라 등의 은밀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 숨어지내는 곳'을 의미한다. 중반부와 후반부는 크게 볼 때 "상처", "흉터", "침묵" 등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비트" 내부의 상황 및 "우리"의 관계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연속선에 있다. 중반부 2연의 시작 부분인 "한때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라는 문장은 초반부(1연)를 토대로 도약하면서 중반부 이후 전개되는 "비트" 내부의 상황을 견인한다. 이 문장이 가지는 표면 장력은 후반부까지 유지되면서 "비트"의 양상을 강하게 암시한다. '나'와 '너'로 구성되는 "우리"가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하는 것은 동일한 아픔과 고통을 가지지만 상호 교류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주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비밀 아지트"가 "출구가 없는 터널 속", "빠져나올 길을 영영 잃어버"림, "파국", "접선할 방법을 영영 잊어버"림 등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이러한 폐쇄적 단절의 속성에서 기인한다. 

  화자는 3연에서 폐쇄적 단절성을 기초로 "비트"를 만드는 과정과 그 속성을 진술한다. "흉터"가 신비한 담장이 되어 비트를 구획"하는 것은 아픔과 고통을 원천 재료로 삼아 비트를 만든다는 의미이고, "꼭꼭 숨어서 침묵으로 저항"하는 것은 폐쇄적 단절성을 무기로 삼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버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비트"가 전투적 은유뿐만 아니라 다른 복수의 은유와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비트"는 기본적으로 전투적 은유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혁명은 없다."에서 정치적 은유와 연계하고, "사랑과 암시의 역사가 쓰이는 방식"에서 연애적 은유와도 연계하면서 중층적인 의미 맥락을 형성한다. 이 세 가지 층위의 은유가 중첩하면서 의미 맥락을 수렴하고 결집하는 내밀한 과정을 밟아서 "모든 것들은 가능할 때까지만 지속된다./ 지속하는 매 순간 불가능으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라는 문장에 도달한다. (p. 시 131-132/ 론 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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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8월(416)호 <기획 연재 ㉒/ 2000년대 젊은 시인들> 에서

  * 신동옥/ 시인, 2001년『시와반시』로 등단, 시집『고래가 되는 꿈』『밤이 계속될 거야』『달나라의 장난 리부트』등

  * 오형엽/ 문학평론가, 1994년 『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 1996년 《서울신문》신춘문예 평론부문 등단, 비평집『신체와 문체』『주름과 기억』『환상과 실재』『알레고리와 숭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