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추사를 지켜준 꽃
- <제주수선화> 수선화과
강은희/ 생태작가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볼거리입니다. 강절江浙 이남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마을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송이가 많게는 십수화十數花, 팔구악八九萼, 오륙악五六萼에 이르되 모두 그렇게 핍니다.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기 시작해 3월이 되면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추사의 이 꽃편지가 아니었다면 수선화꽃으로 눈부신 제주 바닷가의 옛 풍광을 상상해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8년 3개월의 깊고 두려운 고독 속에 서 있던 그는 수선화꽃 더미로 들이치는 바람과 환한 햇빛이 움직임과 명암을 바꾸는 순간순간마다 흰 구름밭도 되고흰 눈 벌판도 되는 장엄함에 흠뻑 빠진 채 잠시 모진 시간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바람과 빛이 꽃들을 몰아쳐 만든 꽃바람 속에 흠뻑 빠져본 경험을 추사와 겨룰만한 사람은 단군 이래 아직까지 없을 것이고 꽃편지 한 통으로 그를 넘어선 사람도 아직 없습니다.
그의 편지에 적힌 수선화는 덧꽃부리*가 있는 수선화가 아니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겹수선화입니다. 희고 넓은 꽃잎 속에 짧거나 길쭉한 노란 꽃잎과 흰 꽃잎이 제멋대로 섞여 나폴거리는 모양이 아주 분방한 느낌을 줍니다. 고립된 섬에서 고립되어 자라는 식물이 피워낸 분방한 꽃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땠을까요? 수선화의 아름다움에 온전히 집중했던 시간이 길바닥에 떨어져 누운 꽃줄기 하나까지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겠지요. 누운 꽃줄기가 만든 가련함에 이끌린 그는 허리를 굽힙니다. 주워 든 '가련함'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고독한 사람에게 꽃줄기는 '보리밭'이라는 생계까지도 넘어서게 하는 애틋함을 자아냈을 것입니다. 'ᄆᆞᆯ마농'을 처음으로 수선화라는 '꽃'으로 불러준 사람과 8년 3개월을 함께 한 수선화는 이렇게 영원히 그의 꽃이 되었습니다.
신화 속의 수선화가 건네는 인상과는 전혀 다른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뜻밖의 매력입니다. 그리고 동서양 모두 실생활에서 수선화꽃은 언제나 큰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서 추사가 '밝은 창 맑은 책상 사이에' 그 꽃줄기를 두었듯 집 안에 수선화꽃을 장식하는 사람도 많고 영화에서는 수선화꽃밭에서 프로포즈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만납니다!
어쩌면 제주수선화들도 자신들에게 마음을 다한 사랑을 보여준 추사에게 북쪽에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았던 '불가능한 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만들고, 그가 그곳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열쇠(옛 이야기에는 활짝 핀 꽃이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를 주었거나 열쇠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와 그의 수선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흐린 날 대정읍에 핀 수선화를 보며 꽃편지 답장을 쓰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지금 이 섬에 수선화들이 피어 바람에 흔들립니다. 선생님의 수선화는······ (쓰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지만) 그냥 갖가지 신품종 수선화들과 함께 살며 함께 피고 있다고만 쓰겠습니다. 바람과 햇빛만큼은 태곳적 그대로입니다." (p. 12)
* 덧꽃부리: 꽃잎이다. 생김새가 매우 독특한 이 꽃잎을 식물용어로는 덧꽃부리(부화관)라고 부르지만 보편적으로 동양에서는 잔(찻잔, 술잔 모양어서), 서양에서는 컵cup이라고 한다. 생활문화가 서양식으로 고착된 현재는 대부분 컵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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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문학광장』 2024-2월(2)호 <꽃이 전하는 말 · 2 > 에서
* 강은희/ 생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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