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서 날개가 꿈틀거리다/ 정숙자 바닥에서 날개가 꿈틀거리다 정숙자 안에도 밖에도 바람뿐이다 풍선은, 비눗방울은 입술에 입술을 대고 바람을 불었던 증거 외로운 가슴 가슴이 그리움 껴안고 웃었던 울음 몸 어딘가 하늘빛 숨긴 아낙네들이 분만실 침상을 오르 내린다 구름 비 안개… 모르는 눈망울이야 얼마나 향긋..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6
보름달/ 정숙자 보름달 정숙자 산소량 부족했던 눈-뭇 소리 가라앉은 눈-꼭대기까지 올라간 슬픔 한 눈금씩 지워나간 눈-동그란 게 길이다 굳 게 믿은 눈-새벽을 지나 아침을 지나, (물 밑 훤히 드러나) 오히려 캄캄한 정오를 지나 길어진 그림자 쉬게 하는 눈- 천 개의 눈을 합친 눈-꺾을 수 없는 운명 앞..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6
그들이 있다/ 정숙자 그들이 있다 정숙자 비 오는 날 산책로에선 발부리에 눈을 두고 걸어야 한다 모처럼 나온 지렁이들이 허리를 고르고 있다 어디서 운명 바뀌었을까 줄기줄기 부풀고 멍든 보랏빛 내디딜 발이 없는 그들은 평생을 기어도 깃털 한 잎 움트 지 않는 이 세상 토씨들이다 들판에서 난바다에서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6
변연대비/ 정숙자 변연대비 정숙자 물방울들이 하수구로 떠내려간다 내 얼굴 담은 물방울들은 어느 둑을 흘러도 내 얼굴이다 초가지붕 굴뚝 너머로 별자리 하나 새로 뜨던 날 배꼽자리 피를 닦은 물 한 대야가 풀밭 지나 하늘을 돌 아 다시금 내 배꼽 닦고 흐른다 유리컵 물 한 모금도 언젠가 거울에 맺혀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6
네 번째 하늘에서/ 정숙자 네 번째 하늘에서 정숙자 편지는 늘 시보다 따뜻하다 허공으로 띄워 보내는 꿈이 아니라 포근히 가 닿을 주소와 그 주소의 주인이 있다 편지는 한 사람이면 모든 독자다 길이 살아남아야 할 부채도 짐지지 않는다 그가 한 번 읽어주는 것으로 생명을 마쳐도 좋다 편지는 내가 아는 한 어..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5
전등과 고양이/ 정숙자 전등과 고양이 정숙자 바람이라도 더 구르는 날은 안에서 불이 꺼진다 깜깜하고 휑한 머리가 퓨즈 나간 전구다 온종일 돌려보지만 슬픔을 문 나사가 한 바퀴도 돌지 않 는다 이렇게도 바람에 약하다니 정품이 아닌가보다 가로등이 되기엔 그른 게지 팔 다리 어깨 어디를 뒤져도 품질인증..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5
백야/ 정숙자 백야 정숙자 찌르지 말아다오 어르지 말아다오 모기가 0.5g일 때 당신 체중은 오륙십 킬로그램 1×2=2 / 2×4=8 당신한테 물리면 나는 십이만 배로 가렵다 가만두어도 끓는 열대야 또르르 또르르 똘 또르르 귀뚜리 귀뚫이야 어서 와다오 -『시안』1999. 겨울호 ------------- * 시집『열매보다..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5
길에 대한 리서치/ 정숙자 길에 대한 리서치 정숙자 정다운 오솔길, 얼었다 풀린 진흙길, 예기치 않은 빙판 길, 돌아나온 골목길, 땡볕 깔린 자갈길, 툭 터진 바람길, 별 쏟은 난바닷길, 앞뒤 모를 굽이길, 구름 고운 뒤안길, 하늘 만 믿는 비탈길… 자! 당신은 타인에게 어떤 길인가? -『 애지』2005. 봄호 ------------- *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나의 니르바나/ 정숙자 나의 니르바나 정숙자 화엄경 첫 장만한 우리 집 거실에서 의자 깊숙이 구겨져 묻힌, 나는 몇 십 년 뒤적거린 사고의 무덤이다 일 년에 한 번쯤 흙 돋우고 더러더러 잡풀 줄거리 들추어내는 그쯤으로 나는 무덤을 돌본다 잔디 뿌리와 머나먼 하늘 사이, 모처럼 정화된 시간이󰡒�..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한 바퀴/ 정숙자 한 바퀴 정숙자 발이 머리로 들어온다 우울한 발은 머리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안개에 질리고, 바람에 막히고, 소신만이 푸른 발 사유 속으로 진입한 발은 하늘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신발이 닳지 않는다 길을 재지도 않는다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린다 발이 창공으로 날아간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