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십의 부록/ 정숙자 내 오십의 부록 정숙자 편지는 내 징검다리 첫 돌이었다 어릴 적엔 동네 할머니들 대필로 편지를 썼고 고향 떠난 뒤로는 아버님께 가용돈 부쳐드리며 “제 걱정은 마세요” 편지를 썼다 매일 밤 내 동생 인자에게 편지를 썼고 두례에게도 편지를 썼다 시인이 되고부터는 책 보내온 문인..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9
간장병과 식초병/ 정숙자 간장병과 식초병 -無爲集 1 정숙자 나에게는 요즘 새로운 손짭손 하나가 생겼다 신문이나 전단 등에서 하루살이로는 아까운 그림을 솎아 엽서로 만드는 일이다 반듯하게 마름질한 아트지에 풍경들을 앉혀놓으면 웬만 한 시보다 따뜻하다 맑아지는 하늘이 세상 밖이다 그 살붙이들 곁에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9
무료한 날의 몽상/ 정숙자 무료한 날의 몽상 -無爲集 2 정숙자 막대기가 셋이면 <시>자字를 쓴다 내 뼈마디 모두 추리면 몇 개의 <시>자字 쓸 수 있을까 땀과 살 흙으로 돌아간 다음 물굽이로 햇빛으로 돌아간 다음 남은 뼈 오롯이 추려 시 시 시 시 시 시 '' 이렇게 놓아다오 동그란 해골 하나는 맨 끝에 마침..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6
멈춤, 상상의 속도/ 정숙자 멈춤, 상상의 속도 -無爲集 3 정숙자 게으름은 게으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제다 게으름에는 규칙이 없다 게으르다는 점 외에는 죄목도 없다 게으른 이의 침묵은 완만하다 그들은 도모하지 않는다 실패/실망/원성도 모른다 게으 름은 땀 흘리던 무릎의 마지막 도약 누군들 세월을 의욕..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6
독사 떼/ 정숙자 독사 떼 -無爲集 4 정숙자 갈채가 몰리는 광장으로 현자들이 모여든다 너도나도 달리기 높이뛰기 앞 뒤 없이 매달린다 가장자리 표목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다 먼 데 구름만이 풍경을 헤아린다 ―현자들은 저마다 복색이 희한하다 ―희한한 옷 없는 자 어울려 뛸 수 없다 ―이 저자에선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6
인생은 꿈이 아니다/ 정숙자 인생은 꿈이 아니다 -無爲集 5 정숙자 저 편의 사흘이 주어지면, ―첫째 날은 온종일 빈둥거리 리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리라 온갖 명암과 잡념으로 더럽혀진 정신을 찬찬히 목욕시키 리라 저 편의 사흘이 주어지면, ―둘째 날은 깨끗해진 시간의 첫 행위로써 편지를 띄우리라 보내온 책..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6
황금분할/ 정숙자 황금분할 -無爲集 6 정숙자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유리창 쪽에 양말을 넌다 발바닥이 바깥을 보도록 넌다 그 안쪽 줄에는 속옷을 널고 더 안쪽 줄에는 화장실만 지키던 타월을 널고 마지막 그늘에는 겉옷을 넌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균등한 빛의 분배다 빨래들은 때 묻고 구겨진 신민 온갖 영화와 치욕을 함께 한 신민일진대 왕은 요즘도 찬찬히 손빨래 한다 군신유의(君臣有意)는 왕으로부터 세제를 덜 풀어 강물이 곱고 헹군 물에 다시 헹궈 달빛이 맑고 관절을 움직여 와탑이 밝다 시간이야 좀 축이 나지만 왕의 신뢰는 왕으로부터 모든 빨래는 반듯이 개어 꼭꼭 밟는다 밟아 넌 빨래들은 언제나 새것이다 납작해지지 않는다 다리미로 고문한 신민과는 다르다 양말까지도 구멍이 나도 처녀 적 올을 지킨다 우리 집 붉은 고무다라이의 주의..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6
열매는 매달림의 언어다/ 정숙자 열매는 매달림의 언어다 -無爲集 7 정숙자 어쨌든 매달리자 아망스런 손 달렸으니 매달리자 매달리기 좋은 손가락으로 매달리지 아니함도 모종의 낭 비 염탐 말자 어디건 매달리자 아느냐 쌀밥, 아니면 보리밥이라도 힘껏 매달리다보면 까치밥이라도 될는지 누가 아느냐 말석에 돋아난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2
7월도 사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정숙자 7월도 사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無爲集 8 정숙자 더위에 전신을 맡겨둡니다 가리마에서도 얼굴에서도 등에서도 땀이 납니다 일 년 내내 닫혀 있던 세포들이 문 열었습니다 묵은 공기가 환기됩니다 빛이 들어옵니다 실내가 새로워집니다 턱턱 숨막히는 이 더위로만이 미세한 창문들을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2
그들은 어떻게 말하는가/ 정숙자 그들은 어떻게 말하는가 -無爲集 9 정숙자 강변도로 방음벽 아래 능소화 한 송이가 떨어진다 서녘 햇살이 그 꽃에 더 고운 빛을 던진다 한강은 잠시 흐름을 늦춘다 역사란 한낱 덧없는 낙화, 담장에 매달린 구름 기어올라 피었다 떨어진 흔적 시인은 바람을, 철학자는 뿌리를, 화가는 줄기..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