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하늘에서
정숙자
편지는 늘 시보다 따뜻하다
허공으로 띄워 보내는 꿈이 아니라
포근히 가 닿을 주소와 그 주소의
주인이 있다
편지는 한 사람이면 모든 독자다
길이 살아남아야 할 부채도 짐지지 않는다
그가 한 번 읽어주는 것으로
생명을 마쳐도 좋다
편지는 내가 아는 한 어떤 행위보다도
고매한 발명이다
어느새 고전이 되어버린 손편지―
그러나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땅 위에선 시를 짓고
하늘에선 책을 읽고, 삼십삼천(三十三天) 바깥에서도
도솔천에서는 편지를 쓴다
이슬 한 방울이 증발하는 시간보다도 빠르게
읽히고 잊혀질지라도, 벗이여
나는 내 소유의 모든 잉크 중에서
가장 슬픈 채도를 아껴
그대의 이름을 적는 데 쓴다
그 속으로 몇 줄의 시가 지나갈지라도
벗이여, 나는 그대의 이름이 한없고 곱다
-『한국시인협회』사화집,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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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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