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그들이 있다/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0. 9. 26. 00:46

 

   그들이 있다

 

   정숙자

                     


  비 오는 날 산책로에선 발부리에 눈을 두고 걸어야 한다

  모처럼 나온 지렁이들이 허리를 고르고 있다

  어디서 운명 바뀌었을까    

  줄기줄기 부풀고 멍든 보랏빛

  내디딜 발이 없는 그들은 평생을 기어도 깃털 한 잎 움트

지 않는 이 세상 토씨들이다 

  들판에서 난바다에서 빌딩 숲 틈서리에서 꺾이고 으깨진

그들

  그 아픈 세월 속에선 목숨보다도 질긴 슬픔이 멀리멀리

자라곤 했다 

  지금도 내 우산 뒤에서 몇몇 밟힌 몸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고만

  한마디 비명도 없이 별로 뜬 토씨들이 대사원(大寺院)

이룬 밤하늘

  내가 버린 자획과 종잇장들은 어느 곳으로 돌아갔을까

  먼 길 둘러온 빗방울들이 꽃 한 송이씩 놓고 흐른다

     -시로여는세상200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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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