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있다
정숙자
비 오는 날 산책로에선 발부리에 눈을 두고 걸어야 한다
모처럼 나온 지렁이들이 허리를 고르고 있다
어디서 운명 바뀌었을까
줄기줄기 부풀고 멍든 보랏빛
내디딜 발이 없는 그들은 평생을 기어도 깃털 한 잎 움트
지 않는 이 세상 토씨들이다
들판에서 난바다에서 빌딩 숲 틈서리에서 꺾이고 으깨진
그들
그 아픈 세월 속에선 목숨보다도 질긴 슬픔이 멀리멀리
자라곤 했다
지금도 내 우산 뒤에서 몇몇 밟힌 몸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고만
한마디 비명도 없이 별로 뜬 토씨들이 대사원(大寺院)을
이룬 밤하늘
내가 버린 자획과 종잇장들은 어느 곳으로 돌아갔을까
먼 길 둘러온 빗방울들이 꽃 한 송이씩 놓고 흐른다
-『시로여는세상』200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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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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