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는 듣지 못한다/ 정숙자 모나리자는 듣지 못한다 정숙자 모나리자의 액자 속에는 소리가 없다. 그녀의 배경은 어 둡다. 남들이 백(百)을 들을 때 삼사십을 듣는 모나리자는 늘상 그렇게 앉아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다. 남들이 손뼉 칠 때 손뼉치고 일어설 때 일어선다. 모나리자는 봄비 소 리와 가랑잎 구르는 소..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10.06
더블 플라토닉 수어사이드/ 정숙자 더블 플라토닉 수어사이드* 정숙자 은하수 푸른 밤에는 강물도 더 빛이 났다 그 요요한 울림 속에서 바위가 숨을 몰았다 하 세월 부대꼈어도 속잎 흔들리지 아니했던 탑 첩첩 불이면서도 봉오리에 머물렀던 꽃 혼자서, 다만 혼자서 하늘 끝 오르내린 섬이었건만 맑고 따뜻하고 그리고 순한, ―낮은 음의 노래밖에는 부를 줄 모르는 물살에 실려 천 겹 만 겹 향내를 피워 올렸다 어둠은 더 이상 그늘이 아니었다 벙글고 벙근 아지랑이와 보름달로 맞물린 반달 두 개가 들녘 어딘가로, 세상 밖 어딘가로 떠내려갔다 -전문-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10.03
이런! 이런, 이런/ 정숙자 이런! 이런, 이런 정숙자 사돈댁에서 꼬막을 한 상자 보내왔다 뻘이 잔뜩 묻어 있다 와르르 쏟아붓고 문질러 씻는다 살아 있다는데 얼마나 무섭고 어지러울까 꼬막끼리 부딪는 소리가 하늘에 찬다 씻고, 씻고 몇 번이고 또 씻고 끓는 물에 꼬막을 집어넣는다 “살아 있는 꼬막은 끝까지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10.02
무인도/ 정숙자 무인도 정숙자 서푼짜리 친구로 있어줄게 서푼짜리 한 친구로서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서 있어줄게 동글동글 수너리진 잎새 사이로 가끔은 삐친 꽃도 보여줄게 유리창 밖 후박나무 그 투박한 층층 그늘에 까치 소리도 양떼구름도 가시 돋친 풋별들도 바구니껏 멍석껏 널어 놓을..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30
불시착/ 정숙자 불시착 정숙자 뭉쳐진 의미가 고층에서 떨어진다 짐승들은 죽어서 먹히지만 인간은 먹혀서 죽는다 꿈을 감싼 비늘, 의지를 품었던 피와 살이 뜯겨져나간다 더 이상 먹힐 게 없어졌을 때 바람은 그를 벼랑으로 밀어버린다 반짝! 거품이 꺼진다 자살은 결국 타살이다 몇몇 범인을 지목할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8
이브 만들기/ 정숙자 이브 만들기 정숙자 갈비뼈 하나 바치지 않고 자신의 창세기 열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피 묻히지 않고 갈비뼈 하나 주무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진흙이 아닌 바람으로 맺힌 이슬들 꽃을 버려야만 씨앗이 여무는 풀들 외투만으론 추위를 막을 수 없다 이브를 안아야 한다, ―하..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8
열매보다 강한 잎/ 정숙자 열매보다 강한 잎 정숙자 마지막엔 이것뿐이다 꽃 아니다 기둥 아니다 수많은 잎새도 아닌 다만 두 잎뿐 이다 두 잎이면 다시 하늘을 열고 별을 기르고 마파람 부를 수 있다 껍질 속 두 잎은 우뇌/좌뇌란다 좌청룡 우백호란다 씨앗들은 스스로가 명당이요 명문이란다 흔들림 없는 두 잎을..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7
김나현/ 정숙자 김나현 정숙자 김나현은 2003년 7월 어느 날 태어났다 그리고 오늘은 2005년 6월 어느 날이다 나현 엄마 부탁으로 나현을 봐주러 갔다. 나현 엄마는 수 박이 배달되거든 잘 받아 놓으라는 당부를 남기고 외출하 였다. 얼마 안 있어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수박을..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6
섬의 정신/ 정숙자 섬의 정신 정숙자 흔들리는 건 정신이 아니다 맞으면 맞을수록 의지는 더 깊이 박힌다 하지만 고뇌여, ―너무 때리지 마라 욱신거리는 침묵이 지금 이 순간에도 회색 하늘을 지나 고 있다 뭉개지지 않게, 허리도 발목도 휘지 않게, 눈물도 무너지 지 않게 촛불 한 자루 세워 둬야지 그 이..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6
오선의 깊이/ 정숙자 오선의 깊이 정숙자 건반이 어둠에 숨어 뭇 계절을 떠돈다 꽃으로 강으로 독수리로도 깨어난다 하늘 가득 추위가 머무는 동안 지하에 스민 건반은 장차 솟아오를 푸른 음을 돌본다 지층에는 또 하나 태양이 돌고 설 곳 잃은 색채들을 거기 모여 쉬게 한다 상처가 자랄 때마다 음표들이 갖..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