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변의수_···주제적 접근의 실험작업과 유의미성(발췌)/ 피어나는 연꽃 : 강병철

피어나는 연꽃       시집 『대나무 숲의 소리』에서      강병철(Byeong-Cheol Kang)    한 옛날에, 현인이 말하였네  행복해라.  편안해라.  자신을 진정시키는 법울 배우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라.   명성과 훈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바람에 사라져 버린다.  당신의 인간성이 사라지면,  당신은 귀중한 보석을 잃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자연법칙을 존중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  모든 것이 늙어가고 있다.  현명한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의미 없는 대화를 할 때,  논쟁을 벌일 때,  당신이 무상한 것에 대해 논쟁하고 있음을 깨달아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성문화된 규칙과 불문율을 따르라  호흡을 깊고 천천히 하라.   행복해라. ..

이름 없는 아이*/ 김상미

이름 없는 아이*      김상미    네 이름이 뭐니?  저는 이름이 없어요  왜 이름이 없니?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니?  저는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요  아무도 제가 태어나 이만큼 자란 것을 몰라요  엄마는 제가 오월에 태어났다고 오월이라고 불러요  남들에게 저는 유령이에요 투명인간이에요  아저씨, 아줌마들이 저를 이곳에서 찾아내기 전에는  늘 이곳에 숨어 있었어요  저는 엄마가 강간당해 낳은 아이에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라요  저는 엄마가 저를 끌어안고 슬피 울 때마다 무섭고 두려워요  엄마가 저를 버릴까 봐 엄마가 저를 두고 어딘가로 가버릴까 봐  엄마가 일하러 가고 나면  아무도 없는 이 방에서 저는 햇볕도 쬐고  화분에 물도 주고 소리 죽여 그림책도 읽어요  아주 가끔은 아무도 몰..

남자의 일생/ 이재훈

/ A poem from Korea Lee, Jai-Hun>     남자의 일생      이재훈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전문(p. 126) * 블로그註: 외국어 대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 * 『상징학연구소』 2024-가을(15)호 / 국내 시인 외국 지면 게재>에서  * 이재훈/ 강원 영월 출생, 1998년『현대시』로..

정착/ 김지녀

/ A poem from Korea Kim, Ji-nyeo>     정착     김지녀    노트에 배 안에서 읽은 책의 제목을 적었다  이것이 기록의 전부다  노트는 열려 있고   한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이 섬이 나에겐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사하기가 어렵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해안선이 복잡했다   이 섬으로 들어오는 일은 좋았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을 간직한  좁고  비천한 골목을 내고  난파 직전의 배처럼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 나를 일렁이게 했으므로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새가 보이지 않아서  음악과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책의 제목만 적힌 노트에 섬, 이라고 적었다  조금 일그러진 모양으로 섬이 커졌다  길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

김겸_시의 발명에 대한 췌언(발췌)/ 강가에서 : 이영광

강가에서      이영광    떠남과 머묾이 한 자리인  강물을 보며,  무언가를 따지고  누군가를 비워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나쁜 생각인 줄  모르고서  흘러도, 답답히 흐르지 않는  강을 보면서,  누군가를 따지고  무언가를 미워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상하지 않고  오직 나만 피 흘리는 중이란 걸  모르고서  그리고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 줄도  까맣게 모르고서     -전문, 『시로 여는 세상』, 2004-봄호   ▶ 시의 발명에 대한 췌언(발췌) _김겸/ 시인 · 문학평론가 · 소설가  이렇게 시는 후회와 성찰의 몫을 감당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무언가를 따지고/ 누군가를 미워"하며 산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타자는 절대적 타자이며 감옥이..

김겸_시의 발명에 대한 췌언(발췌)/ 여름 연못 : 이승희

여름 연못      이승희    처음 보는 연못이었다  버드나무가 물 위를 걷고 있었고  가끔 물을 열어 보느라  투명한 무릎을 꿇기도 했다   이 기슭에서 저 기슭까지  누구의 마음일까  버드나무도 그게 궁금했을까   당신을 따라 건너가던 여름이 있었다  마음을 닮은 것들  그런 것들을 주었고  그런 것들을 잃었다   그런 것들이 물속에서 물고기처럼 흩어졌다  나쁘지 않았다   이거 가져  너 가져   괜찮아  다 가져도 돼   연못은 그런 마음  버드나무 아래에서 오래 살았다  여름이 멈춘 후에도  연못이 사라진 후에도  그것들의 이 기슭과 저 기슭까지   물의 얼굴을 한  버드나무 잎들이 떨어지고 있다   연못은 그렇게 생겨나기도 한다    -전문, 웹진『같이 가는 기분』, 2024-봄호   ▶ 시..

누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누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 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전문(p. 169-170)   ------------------..

새를 기다리며/ 복효근

새를 기다리며      복효근    청동빛 저무는 강  돌을 던진다  들린다 강의 소리  어머니 가슴에서 나는 소리가 그러했지  바위를 끌어안고 제 몫의 아픔만큼 깊어지는 강의 소리  새벽 강은 가슴 하류에 희디흰 새 모래를 밀어내  모래 위엔 이슬 젖어 빛나는 깃털 몇 개   비상의 흔적으로 흩어져 있었지  그 기억으로  새 한 마리 기다려  돌을 던진다 절망절망 부서진 바위 조각을 던진다  부질없을지라도  그 부질없음이 비워놓은 허공을  돌은 날고 있을 때 한 마리 새를 닮는다  강물 속에서 돌은 새알이 된다  보인다 이윽고  닳아진 돌의 살갗 밑으로 흐르는 피  맑아진 하류의 강물 속  던져진 돌은 기억하고 있다  용암을 흩뿌리던 화산 근처에서 씨알을 찾던  지금은 화석이 된 시조새의 형상을,  돌..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9/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9     정숙자    제 수첩의 첫 페이지엔 언제나 당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 주위에 오늘은 많은 꽃을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색칠은 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수첩의 하얀 바탕을 그대로 간직ᄒᆞ고 싶었습니다. (1990. 12. 20.)              얼핏 작년에 쓴 메모가 보입니다.  ‘무덤 나비’ 2023. 8. 9-1:38, 라고요  잠시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내일모레 현충일이 다가오는데···  신에게나 바쳤을 1990년의 하얀 독백과 지난해 수첩 속 무덤 나비와 꽃을 들고 지아비 찾아가는 하루 풍경을···  삼십 년 전(부터)에 누가 예견했던 것일까요 그 누가 지켜봤던 것일까요 대체 누ᄀᆞ 왜 제 벼루에 불어넣어  자신도 모르는 새 받아적게 했던 걸까요..

극락강역/ 고성만

극락강역      고성만    무궁화호 열차가 도착한다  선로를 따라  강물이 밀려온다   허리까지 남실남실 잠겨드는 강  토끼풀 삐비꽃 자운영 피어나던 강  조각배 한 척 두둥실 띄워  조기 홍어 젓갈 실은 채  오르내리던 강   아파트로 둘러싸인 언덕  노란 물탱크  드높은 고가도로에  잊히지 않는 추억처럼  울음만 남기고 사라진 이름처럼   밀려온  물결 휘감아  무궁화호 열차가 떠난다    -전문(p. 147-148)    --------------------  * 『시와경계』 2024-여름(61)호    시인을 찾아서>에서  * 고성만/ 전북 부안 출생,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파씨 있어요?』외, 시조집『파란, 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