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군락(群落)/ 박해람

군락群落      박해람    대부분 열매들은 동그랗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멀리 굴러가라는 뜻이다. 동그란 형태의 도움을 받든, 그도 아니면 운 좋아 살짝 경사진 내리막의 도움을 받는 최대한으로 슬하에서 벗어난 그 한계점에서 모여 사는 군락지들, 나무들, 식물들의 마을인 군락지를 만날 때마다 모두 타고난 형태와 행태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는 천형들이 있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언젠가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 문주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문주란은 썰물 때에만 그 열매를 떨군다고 한다. 섬을 떠나 더 넓고 먼 뭍으로 가라는 뜻이 담겨 있겠지만 군락의 가장 큰 요건 중 하나는 매개媒介와 날씨가 아닐까 한다. 인간과 달리 식물은 날씨가 모국이고 고향일 것 같다.   모이고 흩어지는 일에는 다양한 ..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주고  보듬어 껴안아 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전문(p. 4)    ---------..

전철희_불안정한 세계 속의 사랑(발췌)/ 육짓것 : 죄금진

육짓것      죄금진    제주에 이주한다는 건 마지막 버스를 놓치는 기분이지요  스스로를 용서하는 느낌  여기선 그 이주민들을 '육짓것'이라 불러요  떠돌이 버릇은 끝내 못 고친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집으로 가는 마을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자꾸 본전이 생각나서 노름판을 서성이는 느낌  견딜 수 없다면 다시 육지로 돌아가요  여기서도 직업은 있어야 하고  살림을 살아야 하고, 인맥도 만들어야 하고  불 꺼진 방에서 혼자 늙어갈 노후도 걱정해야죠  바다만 쳐다보고 있어도 될 줄 알았죠  오름의 억새꽃처럼 바람을 이기는 지혜라도 생길 줄 알았죠  육지에선 제주가 좋았고, 제주에선 육지가 그리웠지만  그런 말은 패배 같아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고요  나침반 같은 거, 이정표 같은 거 필요 ..

가시와의 이별/ 양재승

中     가시와의 이별     양재승    목구멍에 가시가 걸렸다 가시는 벽에 박힌 못처럼 빠지지 않는다 숨을 쉴 때도 가시가 느껴지고 물을 마실 때도 가시에 물의 뼈가 걸리는 것만 같다   가시는 고통의 옷걸이  가시는 아예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시간이 갈수록 밑동이 굵어지는 것만 같다  아무리 잘게 씹은 밥알을 삼켜도 가시 뿌리에 걸려  밥알에서 자갈 부딪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고 흐물흐물 데친 푸성귀는 옷가지인 양 턱 걸리는 것 같다 손가락을 오그려 뽑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핀셋으로 빼려 해도 보이지 않는 가시는   생선에 꽂힌 꼬챙이처럼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어쩌면 나는 미늘에 걸린 고기인지도 몰라  허공에 투명한 줄이 있어 저 하늘 위에서 누군가 그 줄을 순간 잡아챈다면  버둥거리는 ..

도깨비/ 박순원

도깨비     박순원    나는 얌전하게 나의 차례를 기다린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월화수목금토일  한놈 두시기 석삼 너구리 오징어 육개장   부지깽이나 몽당빗자루 같은 것들도 쓰다가 아무 데나 버리면 저 혼자 도깨비가 된다 (최명희, 『혼불』 중에서)    나는 얌전하게 나의 차례를 기다린다 주민센터에서 병원 외래진료 대기실에서 은행에서 우체국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린다 화면을 터치해서 음식을 주문하고 순서를 기다린다 387번 고객 27번 고객 515호번 고객 10273번 고객 삼백칠십오만팔천육백오십사번 고객 기다리다 기다리다 보면 순서가 온다 내 순서 내 차례   나는 대체 가능한 자원이다 대체 가능한 소비자가 대체 가능한 고객이다 부지깽이 빗자루 지게작대기 바가..

곰탕 한 그릇/ 고선주

곰탕 한 그릇     고선주    문예창작과 지망생인 딸내미가 올빼미가 됐다  뜬 눈 하얗게 지샜지만 날아가지 못했다  밤새 글 날갯짓하느라 기상은 없고 눈만 뜨다  점심을 맞는다  방문 열어도 모른 채  죽음보다 깊은 잠  밤새 잘 익은 글을 원했을 것이지만  한참 나갔던 글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멀리 줄거리를 뺀 줄알았는데  여전히 초입니다  늘 잘 익은 글을 소망했겠지만  풋내 가득한 글만 만진 것이다  그의 아버지도 사십년 넘게 글을 써 왔으나  여전히 곰삭은 글을 맞이하지 못했다   살면서 서로 피차 뜨거운 맛은  피해보자 약속하며  사춘기와 갱년기 간 일시 휴전을 선언한 뒤  곰탕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포장 하나 해서 털레털레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앉은 딸내미 무릎 위에  ..

혼자 먹는 식탁/ 최서진

혼자 먹는 식탁      최서진    세상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듯  혼자 먹는 저녁   슬그머니 실존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고요 앞에서  나는 홀로 밥을 먹는 고독한 왕   봄 바다처럼 찻물이 끓는데  늙은 손목을 가진 왕은 꾸물거리고  뜨거움이 모자란 차를 마신다   왕은 밥을 먹으며 한 발로 다른 발을 긁는다  국물을 흘렸는데도 닦지 않는다  일방통행로처럼 시간이 만들어 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믿는 표정이 되어   더 '고독하세요' 왕이 명렬하고 왕이 듣는다   한없이 다정하면서 외로운 식탁에 앉아  고독한 왕은 책을 읽고 행운이 담긴 편지를 쓴다  가장 느리게 오고 있는 행운의 편지를 기다리며  봄 바다의 반짝임에 대하여  슬그머니 혼자서 중얼거리며     -전문..

박동억_인간을 향한 기다림(발췌)/ 손바닥의 샘 속에 : 박형준

손바닥의 샘 속에     박형준        손바닥은 그릇이라 여기며  샘가를 거닐다 보니  손바닥에 고이는 하늘,  농사짓지 않아 논바닥에 가득 핀 패랭이꽃   웃지 않던 아버지 웃음 같  손바닥 속 꽃   샘물이 흘러넘쳐  손바닥은 그릇이 되고  "저녁 밥 먹어라"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 고이고   몰래 손바닥에 피었다 간 꽃과  그늘과 방향 잡지 못하고 헤매던 청춘의 길과  저쪽 버스정거장에서 내리는,  겨울에 이불 함께 덮어쓰고 불 끄고 텔레비번 보던,  옆집 아이, 서울 가서 하이힐 또각거리며  신작로를 걸어가고   신작로에 날리는 먼지,  여자에의 웃음소리 미숫가루처럼 풀풀 날리고,   손바닥의 샘 속  손금처럼 샘 솟는 패랭이의 뿌리   초여름 들판에  샘물이 있고  지금은 없는  샘 속의..

거북의 살을 먹는 들개의 살을 먹는 호랑이의 살을 먹는······/ 이장욱

거북의 살을 먹는 들개의 살을 먹는 호랑이의 살을 먹는······      이장욱    ······그런 환상 속에서   나는 거북의 살을 먹는 들개였다가 들개의 살을 먹는 호랑이였다가······   개미가 되었지.  개미가 되니 좋았지.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고 결국  호랑이를 잡아먹을 수 있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당신의 살과 내 살 사이의 거리는  당신의 죽음과 내 죽음 사이의 거리와 같아서  우리는 거의  한 몸이었다.   나에게 추도사를 해주세요.  들개가 거북의 추도사를 하듯이  호랑이가 들개의 추도사를 하듯이   우리는 사무실을 나와 다운타운을 걸어갔다.  개미 군락처럼  긴 생이 펼쳐져 있었다.    -전문 (시집『음악집』 2024. 문학과지성사)    * ..

김지윤_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선···(발췌)/ 초전의식*의 자서전 : 성기완

초전의식*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the transconductive consciousness     성기완    1. 서시     - 20240308금 몽홀   동작들이 느려지며 물 흐르듯  이어진  움직이고 있는 내가 편안히 들뜨면서  가라앉음  이렇게 백지 상태가 되면 안되는데 싶으면서 기분좋게  멍해짐  수면과 의식의 중간이랄 순 없고 의식이 있고  몸이 뇌의 명령을 잘 따르고 있는 상태에서의  잠들 무렵 호수가의  뇌파임  내가 시키는 대로 몸이 활발한데  나른함  이게 그 상태구나 하는 자각  느린 평온의 발열  몽홀의 시간 초입  안에 더 있고 싶은 행복감   지출결의서를 가져와  시로 채웁시다  드문드문   안타까운  집에 와서도 계속되는  짧은 이 지나감의 좋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