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연두색 띠/ 최금녀

연두색 띠     최금녀    내 첫 시집은  뻐꾹새 우는 초여름  호박밭에서 호박잎 이슬을 품는 연희동 언덕  한복 할아버지가 따주신 애호박 색깔  연두색 띠를 둘렀다   애호박 썰고 된장을 넣으면  이슬 보글거리고 햇볕 우러나  제법 괜찮은 맛이라고  오래 다닌 방앗간에 하나  채소 가게에 하나  미장원에 하나  지물포에 하나  동창회 총무에게 하나   연두색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박잎에 검은 점이 박히는 가을  폐업이라고 써 붙인 문을 열고  방앗간 그 여자  이슬 마르지 않은 연두색을 받던 그 손으로  내민 검은 비닐봉지  우리 폐업했어요   카페로 바뀐  방앗간을 지날 때마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중얼거리는 고춧가루의 소리를 듣는다     연두색이 참 예뻤어요      -전문(p. 138-..

빛나는 아침의 이야기/ 박형준

빛나는 아침의 이야기      박형준    눈 많이 내린 아침결엔  지붕에 올라가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위 눈발을 털며  들판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는 새들의  날갯짓을 흉내 내었다  담벼락에 기댄  삽에 쌓인 눈이 흩날리며  햇빛에 떠다니는 모습 바라보았다  마을로 날아온 아침 새떼들이  첫 발자국을 찍고 있는 건너편 지붕들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새들의 울음소리 들으며  친구들이 떠나갈 때  손 흔들던 환영에 빠지곤 하였다  나도 언젠가 마을을 떠나겠지만  새들이 첫 발자국을 남긴  햇빛으로 가득한 아침 지붕의 빛나는 눈의 언어로  내 이야기를 써나갈 날이 오리라 기대했다     -전문(p. 110)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7      정숙자  사랑은 섬광     사랑은 악상 또는, 사랑은 ᄈᆞᆯ강과 초록 (1990.11.23.)              이제 하나둘 느껴지네요 초록과 ᄈᆞᆯ강의 사이와 차이   절규와 진리란 ᄈᆞᆯ강과 초록의 순환 고고성呱呱聲으로부터 단말마까지  그와 그들, 그리고 나  우주 간 한 틈새 노래였던 걸   -전문(p. 196)   -----------------------  * 한국시협, 김수복 외 『우리 땅 나의 노래』/ 2024. 7. 30. 펴냄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첫 시집 『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 열 번째시집『공검 & 굴원』

가을단서/ 김영미

가을단서      김영미    몇 줄 잎들이  내 의식의 지퍼를 열고서  뭉텅뭉텅 빠져나오는 듯한 오후  바람이 분다  창은 이럴 때 늘 벽이 된다   커피는 내가 새벽꿈들을  다 몰아낸 뒤에나 끓을 것이다  기다림이 왜 오랫동안 거실에서  풍토병처럼 동거하는지  커피를 끓이다 보면 알게 된다   어제도 누군가의 태양이 서쪽으로 졌다  오랜 병고 끝에 있는 아버지와  며칠간 통화가 부재 신호로 바뀐  고향 친구 부음으로 느닷없는 날에도  서녘 하늘은 몽환처럼 붉다   허공 한편에 위태롭게 매달렸던 이별의 언어들은  쉽사리 밟히지 않을 거실 속을 헤맨다   맞잡은 손을 놓아야 할  이별의 영토를 넘겨다보는 일은  얼마나 눈물겨운 아름다움인지   나는 창 밖 풍경들이 나무에게 가려질 때마다  바빠지기 시작한..

그 많던 엄마는 다 어디로 갔나/ 정끝별

그 많던 엄마는 다 어디로 갔나             정끝별    살던 집 한 채가 비워졌다   구석구석 채워진 살림살이가 버려졌다  매일매일 가꾸던 온갖 꽃나무들이 여기저기로 보내졌다   흙으로 돌려보내고 온 날엔  좋아했던 냉장고 속 흑임자죽을 데워 먹고 잤다  아직 많이 남은 죽들은 냉동실에 넣었다   끝까지 한 몸이었던 휠체어도 기저귀들도 보내지고  계약은 파괴되고 계좌는 비워졌다신분증도 반납했다.  주민센터에 제출한 사망신고서 한 장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같이 자던 짐대에서 일어나  같이 쓰던 그릇에 같이 쓰던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같이 숨 쉬던 공기를 들이쉬고 내쉰다   내 삶의 주어였던 엄마  목적어이자 동사였던 엄마   아, 감탄사였던 엄마   다 없다 이렇게 다 있는데. 세상 빽뺵..

뻐꾸기 소리/ 서지월

뻐꾸기 소리     서지월    뻐꾸기가 운다  점심 밥때가 되었다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   얼른 밥 먹어라고  깨소금 뿌린  오이미역채국에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엄마는 내게 이르신다   밥때가 되면  뻐꾸기를 불러서  내게 이르신다   칡꽃 위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전문(p. 111)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 서지월/ 1955년 대구 달성 출생, 1985년 『심상』 &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백도라지꽃의 노래』『나무는 온몸으로 시를 쓴다』등

의자의 완성/ 권이화

의자의 완성      권이화    의자 모양으로 의자는 태어난다 의자는 목이 길고 등이 푹신하며 의자는 흰색이다   의자는 조금씩 검어지고 있다 의자는 누군가 알 수 없지만 의자는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있다   조용히 밀고 당기는 손 매일같이 커다란 우주를 안고 휴일도 없이 노래를 불러   소리와 먼지를 기원처럼 모시고 여기저기 자라는 우두커니와 부드럽게 내리는 무료를 바라보기도 했다   만약 의자가 제 커다란 덩치로 지쳐 있다면 그것은 사연을 안고 무너지는 마음 넘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움직이는 악기 모카커피가 포레의 레퀴엠을 눈물로 되감을 때 의자는 리듬을 갖는다   우주의 두 번째 문을 여는 레퀴엠이 들리고 무표정으로 의자를 완성한다   상쾌한 손이 의자를 밀친다 의자는 방글 방을 한 바퀴 ..

강문출_다시 읽고 싶은 시/ 먼 곳 : 문태준

먼 곳     문태준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웅큼, 한 웅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과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전문(p. 172)   ♣ 문태준의 시 「먼 곳」은 마지막 이별에 대한 애달픈 헤아림이다. 모든 사람들이 갔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

음악 분수대/ 이영옥

음악 분수대      이영옥    여름 저녁이었고  분수대 쇼를 볼 수 있는 시간대에  우리는 공원에 갔다   색색의 불빛과 음악에 맞춰 물이 춤췄다  사람 틈을 비집고  나는 물의 억센 팔에 갇힌 새를 보았다   비명을 지르다가  날개를 늘어뜨리며 새는 죽었다   다족류의 물장울이 조문행렬처럼 기어 나왔다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분수 쇼는 끝나고  사람들은 2부처럼 서둘러 집으로 갔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내가 갇힌 기분이 들었다   파랗게 질린 새를 외면한 채  춤추는 물에게 열광한 죄   고요를 퍼 담은 분수대 주변에는  새의 슬픔이 탄피처럼 버려져 있을 것이다   한여름 밤인데 추웠다  축축한 발을 자꾸 만져보았다    -전문(p. 264)  --------..

허공 길/ 강서완

허공 길      강서완       한 번도 질문하지 않은 빛이 꽃을 물고 와    나뭇가지에 쏟아졌다  빛이 흔들리는  그것이 유목이거나 사건이거나  빛에 몰려드는 새들을 쫓지 않았다   수많은 걸음이 허공을 걸었다  가지는 가지를 만들고  꽃이 새로운 알을 여는  그것이 형상이거나 흐름이거나  창마다 빛이 쏟아지고  보이지 않는 길이 생기고 허물어졌다   비바람에 뒤집히면서도  왼쪽이 기울어지면서도  그 많은 빗살들을 어디에 쟁이는지  어떻게 둥근 그림자를 만드는지   구름이 뭉쳐 쏟아지는 대로  시든 꽃잎 지는 대로  하늘가 멀어지는 새 떼와  돌아오는 새 떼를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강물에 하얗게 퍼덕이는 윤슬이  흰 머릿결에 빛날 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궤적이  안을 둥글게 채웠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