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이승희_무한을 향해, 무한의 너머를 향해(발췌)/ 설계 : 강영은

설계     강영은    나는 내가 빈집일 때가 좋습니다.   침묵이 괴물처럼 들어앉아 어두운 방을 보여줄 때 고독한 영혼이 시간과 만나 기둥이 되는 집, 증거 없는 희망이 슬픔과 만나 서까래가 되는 집,    우주의 법칙을 속삭이는 별빛과 그 별빛을 이해하는 창가와 그 창가에 찾아든 귀뚜라미처럼 우리는 하나의 우주 속에 들어 있는 벌레라고 우는 집,    희고 깨끗한 미농지를 바른 벽이 도면에 있어 닥나무 껍질에 둘러싸인 물질의 영혼처럼 영혼의 물질처럼 나는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있어 충만한 집,   내가 알고 있는 숲은 결코 그런 집을 지은 적 없어 새장 같은 집을 그릴 때마다 영혼을 설계하는 목수처럼 종달새가 날아와 얼기설기 엮은 노래로 담을 쌓는 집,   수백 년 묵은 팽나무가 지탱하는..

오형엽_모티프, 인유, 몽타주, 알레고리(발췌)/ 사육제의 나날 : 신동옥

사육제의 나날     신동옥    당분간은 당신의 죄악을 노끈으로 동여매 집밖으로 내놓으십시오.  쥐들이 돌아가는 길마다 슬픔이 창궐합니다.   쓰러진 자들을 짓밟고 춤추며 교회당으로 몰려가는 무리를 보십시오.  새벽입니다. 손을 맞잡고 이마를 맞대고 육식에 힘쓰는 시간입니다.   마지막 날  이윽고 스테인드글라스 위로 빛이 스미겠지요.  누구고 이 성스러운 병病의 벽을 깨부술 수는 없습니다.    -전문(첫 시집『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p-13/ 문학동네, 2021.)   ▶모티프, 인유, 몽타주, 알레고리/ 신동옥 시의 미학적 방법론上 (발췌)_오형엽/ 문학평론가  이 시는 첫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의 서시로서 '죄/회개' 모티프를 중심으로 신동옥 시 세계의 기본..

환절기/ 윤여건

환절기     윤여건    매미가 운다. 사방팔방 외치는 소리 아니라 몇 남지 않은 여름날의 마지막 방아쇠. 엷은 구름강 위로 떠간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풀벌레 소리. 밤도 아닌 한낮에 그것도 떼 지어 부르는 긴 꼬리의 화살표들    환절기.   풀꽃 향 번져 오는 내 마음의 여울목. 길고 길었던 불안과 고요의 어느 중간쯤 아, 가을이 빈 배 타고 오나보다.    -전문(p. 49)  -------------------  * 『현대시』 2024-7월(415)호 에서  *  윤여건/ 2008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북녘 집/ 홍신선

북녘 집     홍신선    이거이 피란 나올 때 문단속했던 우리집 대문 쇠때다.  자물통에 딱 맞을 거이디  잘 간직해야디 다시 고향에 돌아가면 필요할 기구만   경도 치매를 앓는  다소곳이 늙은 그녀가 낡은 장롱 밑바닥서 건져 올린  녹 붉게 슬고 절반은 삭은  고리에 꿴 열쇠 하나  그러나 칠십 몇 년  전 두고 온 북녘 집에는  무슨 세상이  괴물이 다 된 무슨 일월日月이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문(p. 21)   -------------------  * 『현대시』 2024-7월(415)호 에서  * 홍신선/ 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

심은섭_공空과 색色의 동일성 증명(발췌)/ 어느 날/ 권현수

어느 날      권현수    내가 버린 하루를  공차기하는 너   지나가는 바람결에  마른 대이파리 흩날린다   5월인데    -전문-   ▶공空과 색色의 동일성 증명/ 선어禪語의 절제와 응축(발췌)_심은섭/ 시인 · 문학평론가  시는 문학적인 형식으로서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 중의 하나가 형식이나 내용을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어詩語의 여러 기능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은 함축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도 일반적인 시론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시의 형식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특별한 경우이지만 형식이든 내용이든 함축이나 압축을 조건으로 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권현수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

호곡장/ 휘민

호곡장      휘민    아이와 저녁을 먹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건  짐승 같은 울음소리뿐   십 분이 넘도록 그치지 않는다   슬리퍼를 끌고 급하게 차를 몰아가지만  나를 번번이 멈추게 하는 붉은빛의 질문들   언니가 울고 있다  집을 등진 채 길 위에서   봄과 함께 사라진 한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주변의 소음을 빨아들이고 있다   어떤 저녁의 울음은  매미 소리보다 뜨겁다     -전문(p. 39)     --------------  * 『문학 철학 사학』에서/ 2024-여름(77)호 에서  * 휘민/ 2001년 ⟪경향신문⟫ 시 & 2011년 ⟪한국일보⟫ 동화로 등단, 시집『생일 꽃바구니』『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중력을 달래는 사람』, 동시집『기린을 만났..

아버지의 주소/ 이종성

아버지의 주소      이종성    모든 것들은  주소지로 간다   북태평양까지 거슬러 올랐다가도  회귀하는 연어들  모천의 주소를 갖고 있다   젊었을 적  필름이 끊어지시고도  용케도 집으로 돌아와 눕던  울 아버지   아흔 넘어 주소를 잃어버리고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아버지  주소 찾아 헤매신다   남의 집 대문 앞에서  겨우 어머니 알아보시고,  '어디 갔었어?'   놓칠세라 주소 붙잡고 졸졸  따라오시는 아버지     -전문(p. 20-21)    * 블로그 註: 일본어 번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  *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여름(77)호 에서  * 이종성/ 199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산의 마음』, 산문집『서대문, 사람의 길을 잇..

울창한 사과/ 김미정

울창한 사과      김미정    누군가 위태롭게 햇살을 익히고 있다   사과를 먹는 일은  사라진 방향을 오래 바라보는 일   붉은 울음이 씹힌다   휘어진 사과의 밤을 만져바요 그날 쏟아지던 빗방울의 고백을 잊지 마세요 멀리 날아간 사과 너머의 열병을, 그리고 잎사귀마다 빛나던 그 번개 같은 순간을   사과는 상처가 모여 완성되는 맛인가  너무 시거나 씁쓸해지는 사과들   맛볼 수 없는 사과가 늘어난다  뭉쳐도 자꾸만 흩어지는 날들   풋사과는 풋사과로 늙어가요 덜 익은 표정이 가지마다 만발하죠 바람은 모서리를 베어먹으며 자라고 다음은 언제나 다음이에요 뒤돌아서는 초록을 부를 수 없어요   나의 사과는  날마다 어두워지고 깊어지고  사과는 사과에 갇히고 피를 흘리고   우린 주먹을 쥐고 겹겹이 아파한..

비보호/ 권승섭

비보호     권승섭    약속을 지키러 간다 주말 오후 두 시 광장  만나면 약속은 쉽게 사라지고   멍하니 서 있으면 기다리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연인을 만난 연인이 빠져나가고  공원의 인원이 두 명 줄어들고   시계탑을 바라볼수록 초조해지는 얼굴도 있었다   멀리서 차 키를 쥔 손을 흔들며 그가 온다   많이 기다렸어?   얼마만큼 우두커니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시계탑을 다시 보아도 알 수가 없고   차 키를 쥔 그와 차가 있는 곳으로 간다  시침과 분침이 겹쳐지는 순간으로 나아가듯   차 앞에서 그가 조수석 문을 연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을 거야   사방과 팔방으로 늘어진 곳에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백운호수 팻말을 지나 우리는 백운호수로 향한다   호수를 지..

아마도, 아몬드/ 최형심

아마도, 아몬드     최형심    아몬드 나무 아래 아무도 없는데 아몬드꽃 사이로 아무도 모르는 이름을 놓아주네. 수도원과 오래된 무덤 사이를 연분홍 우산을 쓰고 걸어도 좋은 시절,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았네. 본 적 없는 아몬드꽃을 닮은 케이크를 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이와 내가 모르는 유월의 오후를 지나 점점 단단해질 사람을 생각하네. 아몬드 나무 아래 아직 아몬드 없어, 지난밤 푸른 손톱에 내린 별들을 헤아리며 영원한 타인들의 연대기를 꿈꾸네. 그리움보다 긴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별 뜨는 은하로 흘러들고 싶은 내 곁에서 아몬드 나무의 눈부신 침묵이 피고 있는데······   (나무로 만든 마음과 고요는 서로에게 잘 어울리네.)   저물녘 어느 해변에서 나비목의 사람들과 멀로 추운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