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상상력이란 무엇인가?(발췌)/ 뜨거운 사람들 2 : 이현승

뜨거운 사람들 2     이현승    반성도 지겹다.  형편없는 연기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는 커튼콜의 관객처럼  무의미한 반성이 반성 자체를 지운다.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   나는 돈벌레를 경멸하지만  순수나 양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가만히 현실을 다그치는 눈빛을 존경한다.  돈보다 정직한 것은 없다는 말은 졸부들의 금언이지만  다음 기회가 없다는 가정으로부터  결과보다 중요한 동기는 없다는 맹목이 만들어진다.   적대야말로 얼마나 완고한 스승인가.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사랑한 사람도 없지만  자기 자신보다 미워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그토록 감정적이면서  정작 가장 선호하는 수사가 생략이라는 것은 얼마나 시사..

육식 습관/ 추성은

육식 습관     추성은    티라노사우루스의 천적은 홍학  시를 쓰는 것과 제목을 쓰는 건 아주 다른 일   마음은 몸을 가지고, 손발의 물성을 가지고 객원으로 찾아오는구나   먼지, 태초의 마음은 먼지였을까, 먼지 이전의 모래. 모래자갈은 한때 돌이었고 돌은 한때 화석이었다고, 먼 옛적 공룡에게도 깃털이 있었다는데, 화석은 발견되었다는데, 공룡의 심장은 인간의 심장을 닮았다는 것도, 홍학에게 쪼아 먹히는 공룡 심장, 그런 거 전부 당신이 알려 준 마음이었지   당신은 내가 시를 쓰기 전  제목부터 짓는 게 나쁘다고  고치라고 했다   가벽과 비계를 세우고 집을 짓는 게 아닌  문부터 세우는 사람  그게 나라고   한 무리의 홍학이 지나간 곳에는  공룡의 뼈와 깃털만 남는다   전시된 모형 공룡 화석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생각하며 시를 버리다/ 최동호

아우구스티누스를 생각하며 시를 버리다      최동호    신에 대한 강한 회의로 경건한 말씀을 전하는  성서를 휴지보다 가치가 없다고 집어 던져 버렸다는   젊은 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떠올리며  나의 시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   나의 시는 그대 한 사람의 마음도 꿰뚫지 못하고  나의 시는 그대 한 사람의 사랑도 얻지 못하고  나의 시에 뒤늦게서야 절망에 빠진다.  나의 시는 종이 한 장 뚫지 못하고  나의 시는 볼펜에서 삐져나와 종이 위에 낙서를 그리고  어두운 수채 구덩이 속으로 사라진다.   나의 시는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하고  나의 시는 종이만 버리고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진다.  한때는 나도 커다란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시는 절망에 빠진 젊은 시절 나를 구해 주었고  나의 시는..

난민/ 채길우

난민     채길우    얼굴만 한 꽃을 틔우고  키를 웃돌 듯 높이 자랐던  수확 앞둔 해바라기들은  가을 폭우에 택없이  쓰러져 버렸다   일으켜 세워  흙을 밟아 주어도 다시  넘어지고 마는 뿌리  얕은 꽃들은 그러나  다음 날 햇살이 비치자   고개 숙인 바닥에서조차  다시 목을 늘어뜨리고  머리를 디밀며 태양을  올려다보기 위해 힘껏  턱을 쳐들었다   좁은 잔발등이 터져  이미 들려 버렸는데도  밑에서부터 썩어 가는 잎사귀에  곱은 어깨가 전부  시들어 뭉개진 채로도    -전문(p. 101)  -------------------  * 『계간파란』 2024-여름(33)호 에서  * 채길우/ 시인, 2013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스스로 웃는 매미』『섬들이 놀다』『옛날 녹..

마카롱 편지/ 이혜미

마카롱 편지     이혜미    기억해? 우린 같은 옷을 입고 캠퍼스를 걸었지 서로에게 얽혀 있다는 약속의 무늬로, 같은 종족이 되어 비슷한 그늘을 얻으려 했어 모르는 표정을 걸칠 때마다 곤란해진 상처들이 쌓여 갔지만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을 한가득 빌려 온 도서관에서 의미의 미로를 헤매다녔지 개기월식이 시작된 오늘을 우주적 마카롱의 날이라고 불렀어 서로의 각도를 겹쳐 어둠을 태어나게 하면 멀리서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지 미루어 둔 과제처럼 남겨진 그늘을 만져 보다 겹쳐지며 하나가 되는 시간을 떠올렸으니까   심장이 자석이라면 떠도는 행성들을 끌어모아 짤주머니에 넣고 외로움의 목록에 익숙한 이름들을 모아 두겠지 투명에 저당 잡힌 무수한 뒷면을 감추고 별 모양의 반죽으로 서로를 기억할 수밖에   그거..

자전거/ 곽효환

자전거      곽효환    옆집 현관 앞에  올해 초등학생이 된다는 이웃집 아이와  아버지의 자전거가 나란히 서 있다  문득 그 무렵 딸아이 민경이가 나와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 쓴 동시가 겹쳐진다             아빠와 자전거를 탄다            아빠가 앞에 가고            내가 뒤를 따른다            아빠의 길이 나의 길이 된다   시를 쓰는 내내 찾아다닌 것이  이 몇 줄에 오롯이 들어 있다  간결하고 명징한 언덕  선명한 비유 그리고  맑고 투명한 마음     -전문(p. 75)  -------------------  * 『계간파란』 2024-여름(33)호 에서  * 곽효환/ 시인, 1996년 ⟪세계일보⟫ & 2002년 『시평』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인디..

송현지_검은 투명(발췌)/ 개구리극장 : 마윤지

개구리극장      마윤지    비오는 날 극장에는 개구리가 많아요  사람은 죽어서 별이 아니라 개구리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언제든 자신의 죽음을 다시 볼 수 있어요  때로는 요청에 의한 다큐를 함께 보고요   주택가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상영 114분  들키지 않고 우는 방법에 관한 재상영 263분   그러나 역시 최고 인기는  새벽녘 같은 푸른 스크린 앞  부신 눈을 깜빡이며 보는 죽음이에요   손바닥을 펼쳐 사이사이 투명한  초록빛 비탈을 적시는 개구리들   우는 것은 개구리들 뿐이지요  이젠 개구리들도 비가 오는 날에만 울지요  의자 밑  인간들이 흘리고 간 한 줌의 자갈  그것이 연못이었다는 이야기   떼어 낸 심장이 식염수 속에서  한동안 혼자 뛰는 것처럼    떨어져 나온 슬픔이  미처..

주영중_이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발췌)/ 밤의 벌레들 : 황유원

밤의 벌레들     황유원    불을 켜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벌레들이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이 담겨 있던 어둠은  얼마나 아늑하고 그윽한 것이었겠습니까?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벌레들을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사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하며 자, 한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은 얼마나 천천히  얼마나 우아하게 이 욕실 바닥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겠습니까?  그 바닥에 자신들을 해할 것은 아무래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세상 편안한 마음으로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을 거라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불을 켜자마자  갑자기 없던 혼이라도 생겼다 빠져나간 듯  그렇게 급..

이성혁_시간에 대한 시적 사유들(발췌)/ 괘종시계 : 백무산

괘종시계      백무산    키 큰 괘종시계 하나 길게 추를 빼물고  낡은 사무실 벽에 말뚝처럼 걸려 있다   이곳에서 다방을 열었던 옛 주인이 두고 간 거라는데  이제 그 누구도 쳐다볼 일 없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완행버스 시간표처럼  곰팡이 얼룩진 벽을 한사코 붙들고 있다   석탄난로와 함께 뜨거웠을 저 시계  금성라디오나 진공관 전축과 함께 돌았을 시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지만 한때는  미인의 얼굴처럼 숨 멎는 시선을 끌었던 때가 있었다   다방은 읍내에서 처음 네온사인을 밝혔을 것이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누구나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달이 차고 기울고 꽃이 피고 지는 걸 보고  닭이 울고 해가 걸리던 쪽을 보고 때를 가늠하던 사람들  시계는 사람들을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갔다  시..

이성혁_시간에 대한 시적 사유들(발췌)/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 허만하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하만하    느닷없이 가벼워지고 싶었다. 나는    가벼워진 잎사귀들은  무리 지어 광활한 가을의 품 안에서 흩어지는 바람의 허전함이 된다.   황갈색 가랑잎들은 멋대로 썰렁한 하늘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곡률대로 휘어지는 비탈 면 따라 움직이는 정확한 기하학적 질서다.   멀리 하늘 끝 지긋이 노려보며, 나는 저물녘이 서서히 농도를 찾아, 내 몸 안에 피처럼 번지는 것을 느끼며,  내 몸을 떠나 빈 하늘 끝 헤치고 싶은 내 손바닥 한 자의 비어 있는 무게를 펼쳐본다.   어느덧 나의 실체는 두 팔 치켜들고 겨울 사상 중심에 서서 광물처럼 황량해지고 있는, 잎 진 한 그루 나무 회초리 끝 명석한 바람소리였다.     -전문 『시사사』, 2024-봄(117)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