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외 1편
송은숙
공원의 소로를 따라 심어진 호랑가시나무
빽빽한 울타리 사이에는 군데군데 틈이 있다
꼭 나무 한 그루 빠진 자리다 벌어진 잇새처럼,
잇새로는 스,스,스,스 발음이 새 나가고
나무 틈으로는 마주 오던 사람이 주춤거리더니 몸을 비켜 빠져나간다
어깨를 부딪힐 일 없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니
나는 틈으로 사라지는 새를 본 적이 있다
깃털 하나와 명랑한 울음 혹은 노래만 남았다
이 겨울에 저리 밝게 울 수 있다니
회개한 거인의 정원처럼 울타리 저쪽은 이미 봄일 수도
나비 날개에 노란 물이 묻어날 수도
틈을 빠져나가는 개를 본 적도 있다
하얀 개의 뒷다리와 엉덩이와 꼬리가
이승의 나뭇가지에 걸린 연처럼 호랑가시나무 진초록 잎에 걸려 있었다
머리와 앞다리는 이미 미궁을 빠져나갔는지
어서 가 보라고 저 엉덩이를 밀어 줄까
반대로 꼬리를 당겨 볼까 망설이는 사이
개는 체셔 고양이처럼 사라졌다
잇몸을 드러낸 개의 웃음만 남았다
즐거워라, 이쪽과 저쪽을 컹컹 부유하는 일
틈을 빠져나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틈을 지나칠 때 내 왼쪽 옆구리는 차례차례 허전하다
소로의 끝에서 되돌아올 때 오른쪽 옆구리도 차례차례,
틈의 저쪽을 보아야만 한다
나무 틈에 눈을 대 본다
누군가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전문(p. 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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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그가 아프리카봉선화 화분을 주었다
아프리카봉선화꽃은 열두 가지 색이 있다
어떤 꽃이 필지 모른다
열기 전엔 알 수 없는 상자 같다
나는 선물 상자처럼 아프리카봉선화 화분을 안고 다닌다
화분을 안고 버스를 타고
화분을 안고 밥을 먹고
화분을 안고 공원에 간다
백합나무 그늘에 앉아 그림책을 읽어 준다
너는 무슨 색 꽃이니? 가끔 속삭이고
보라색 꽃을 찧어 븥이면 손톱에 보라색 물이 들까? 가끔 갸우뚱거린다
선물 상자 안엔 다시 상자가, 그 상자 안에 다른 상자가, 그 상자 안에 또 다른 상자가 있다
그럴 수 있다
열두 번째 상자를 꺼내다 잠이 든다
화분 안에 아프리카봉선화가 심겨 있다
아프리카봉선화꽃은 열두 가지 색이다
열두 가지 색 안에는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백합나무 가지에 작은 새가, 작은 새 안에 연둣빛 벌레가, 벌레 안에 가느다란 노래가 숨어 있는 것처럼
-전문(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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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에서/ 2024. 11. 12. <걷는사람> 펴냄
* 송은숙/ 충남 대전 출생, 2004년『시사사』로 등단, 시집『돌 속의 물고기』『얼음의 역사』『만 개의 손을 흔든다』, 산문집『골목은 둥글다』『십일월』, <화요문학> <봄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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