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외 1편
윤성관
빵점 시험지를 부모님께 보여주지 않고 찢어버린 죄
곤충채집 한다고 잠자리를 잡은 죄
소풍 갔을 때 삼색 김밥을 혼자 먹은 죄
누렁이를 동네 아저끼들에게 주라는 아버지 말을 고분고분 따른 죄
공부하다가 코피가 나면 기분 좋아 웃은 죄
수업거부 투쟁할 때 친구를 꼬드겨 설악산으로 놀러간 죄
다짜고짜 헤어지자는 말로 한 여인을 울린 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 하며 살라고 얘기하지 않은 죄
2년만 더 살고 싶다는 아버지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죄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똑바로 서 있는 법을 잊어버린 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집 새는 곳만 살펴본 죄
얻어 마신 술이 사 준 술보다 많은 죄
고해성사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죄
-전문(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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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고독사
세 평 남짓 원룸에서 청년이 발견되었다
경찰이 문을 열었을 때
방에는 옷가지와 생활쓰레기가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컵라면 안에 한숨이 두껍게 눌어붙어 있었고
영어 문제집 곳곳에 그어진 밑줄이
날개를 접은 연필을 다독이고 있었다
벼랑에 핀 바람꽃처럼 닿을 수 없는 꿈이
청년을 천정에 매달아 놓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경찰은 증언을 거부한 노트북을 수거했다
어둠이 빠져나가자
그믐달이 낯익은 방안을 기웃거렸다
-전문(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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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호박꽃이 핀 시간은 짧았다』에서/ 2022. 4. 15. <지혜> 펴냄
* 윤성관/ 서울 출생, 2020년『애지』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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