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 피
이주송
버려진 차의 기름통에선
몇 리터의 은하수가 똑똑 새어 나왔다
빗물 고인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
한낮의 오로라를 풀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플라타너스 잎들이
노후된 보닛을 대신하려는 듯
너푼너푼 떨어져 덮어 주었다
칡넝쿨은 바퀴를 바닥에 단단히 얽어매고
튼실한 혈관으로 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햇빛과 바람, 풀벌레와 별빛이 수시로
깨진 차창으로 드나들었다
고라니가 덤불을 헤쳐 놓으면
그 안에서 꽃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저 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식물성 공업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매연과 과속으로 탁해진
그동안의 피를 은밀히 채혈하고
자연수리법으로 고치는 중이다
풀잎 머금은 이슬로 투석마저 끝마치면
아주 느린 속도로 뿌리가 생기고
언젠가는 차의 이곳저곳에 새들도 합승해,
홀연 질주 본능으로 기슭을 배회하다가
봄으로 감쪽같이 견인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효율성 좋은 자동차라고
차 문을 열거나 지붕 위에서 뛰기도 하지만
계절의 시속으로 함께 달리는 중이라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금도 차 주위로
푸릇한 수만 개의 부품이 조립되고 있다
-전문-
* 홍일희, 「인간과 자연의 관계 정립의 문제- 니체철학을 중심으로」, 『철학논총』 제3권, 2004, p. 237-258.
해설> 한 문장: 위의 시는 근대적인 인간이 가진 구체적인 욕망과 감각이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이라는 세계관과 미학적으로 만날 수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인간에 대한 일방적 혐오의 정서를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영역과 비인간적 영역의 분단 체제가 폐지되고 "꽃의 시동"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효율성 좋은 자동차라고/ 차 문을 열거나 지붕 위에서 뛰기도 하지만/ 계절의 시속으로 함께 달리는 중"이다. 자연은 모든 존재의 통일체이기에 인간 역시 '자연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세계의 존재 원리는 힘에의 의지이다. "나 역시 '자연으로 돌아감'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본래의 돌아감이 아니라 올라감이다. 즉 높고 자유로우며 심지어는 섬뜩하기까지 한 자연과 자연성으로의 올라감"이라고 말하는 니체가 자연성을 높고 자유롭고 섬뜩하기까지 하다고 이해한 것은 바로 자연이 힘에의 의지를 존재 원리로 갖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감은 곧 힘에의 의지에 충만하다는 의미에서 올라감이 된다.* (p. 시 11-12/ 론 138) <김익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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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식물성 피』에서/ 2022. 10. 21. <걷는사람> 펴냄
* 이주송/ 전북 임실 출생,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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