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백지/ 고영

검지 정숙자 2024. 12. 8. 00:56

 

    백지

 

    고영

 

 

  당신을 초기화시키고 싶었네.

 

  우리가 세계와 만나지 않았던 순수의 시절, 나를 만나 가벼워지기 이전의 침묵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네.

 

  당신은 보이지 않는 강박

  보이지 않는 공포

  영혼으로나 만날 수 있는 미래, 라고 했네.

 

  아아, 당신이 옳았네

  아아, 당신이 옳았네.

 

  문장 몇 개로 이을 수 있는 세계는 없었네. 오지 않는 답신은 불길한 예감만 낳을 뿐

  내 흉측한 손은

  보이지 않는 행간을 떠돌고 있었네.

 

  고양이는 고양이의 방식대로 구르고

  자갈은 자갈의 방식대로 구르고

  펜은 펜의 방식대로 구르고

 

  그러나 모두 근엄한 얼굴이었네.

 

  가득 들어차서 오히려 불편한 자세로부터

  당신의 미소를 꺼내주고 싶었네.

  너무 깨끗해서 두려운

  당신의 그 두근거리는 심장을 돌려주고 싶었네.

 

  지금 내 머릿속엔 오직 당신이라는 프로그램만 실행 중이네.

  다른 창은 띄우고 싶지 않네.

    -전문-

 

  해설> 한 문장: 원하지 않았으나 이미 벌어졌고 돌이킬 수도 없는 사태를 운명이라 부른다면, 상징계야말로 운명의 공간이다. 누가 주체와 세계(대상) 사이의 분열이 없는 상상계를 떠나 상징계로 진입하기를 원했을까. 누가 언어를 애원했으며 언어 지배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길 꿈꾸었을까. 누가 관계와 차이 속으로 들어가 의미 생산의 기계가 되려 했을까. 누가 별이 시체가 되는 현실을 원했을까. 상징계의 폭력에 직면한 주체가 갈 길은 오로지 두 가지뿐이다. 그 하나는 상징계 이전의 비언어, 침묵 혹은 "백지"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계를 찢으며 실재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전자가 오인(misrecognition)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고, 후자는 죽음의 절벽으로 몸을 던짐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길은 적어도 상징계 안에서는 모두 실행 불가능한 길이고 그런 면에서 없는 길이나 다름이 없다. 고영 시인은 단지 '~하고 싶다'라는 문장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그의 소망은 상상계로의 복귀이다. 고영은 "당신을 초기화"하고 싶고, "우리가 세계와 만나지 않았던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것은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 문장과 의미가 생성되기 이전, 운명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이다. 그것은 완벽한 침묵의 공간이며, 언어가 시작되지 않은 자리이고, 존재의 영도零度 상태이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이미 지나갔거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세계를 만들려는 "흉측한 손은/ 보이지 않는 행간을" 헤맨다. (p. 시 14-15/  93-94) <오민석/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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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에서/ 2024. 12. 2. <문학의전당> 펴냄

 * 고영/ 1966년 경기 안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2003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딸꾹질의 사이학』『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감성 시 에세이『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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