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26

서동요_무명(無名)인 나에게/ 윤석산(尹錫山)

서동요     - 무명無名인 나에게     윤석산尹錫山    종이 위에 무명이라고 써본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편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이름이 없을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이름이 없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밤이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깨어난 아침이면  내게 붙여진 이름이 다시 그리워졌다.  나의 두 발이 딛고 온  발자국처럼  어느 낯선 골목에서 비를 맞고 있을 나의 이름.   비를 맞으며, 또 다른 발들에 밟히며  흙탕물 속으로 쓸쓸히 묻혀질  나의 흔적들.  이제는 어디에서고 불려지지  않는 이름을 종이 위에 써 본다.   언덕만큼이나 등이 굽은 사내  하나,  지워지고 있었다.    -전문(p. 220)   -------------..

풍년이 왔네 외 1편/ 최지원

풍년이 왔네 외 1편     최지원    태풍은 무사히 비껴가라던  무논 청개구리 덕분이야  어린 모 사이사이 벌레 잡아주던  오리가족 덕분이야  밤낮 한눈팔지 않고 지켜주던  허수아비 덕분이야  개갱~개갱~지잉~지잉  꽹과리, 징 울리며  두둥~두둥~더덩~더덩~  소고, 북, 장구 치며  얼씨구 좋다!  풍년이 왔네!  덩달아  누렇게 어깨 춤추는 벼  가을하늘 돌리는 잠자리  가을볕 데리고 뛰는 메뚜기  풍년이 왔네!  얼씨구 좋다!       -전문(p. 98)        ---------------------    목련이네 응원레시피    화단 구석 목련이네  뒤늦게 부풀어 오른 아이스크림빵  발효가 늦어지자   봄비: 촉촉하게 무한그램  봄바람: 살랑살랑 무한그램  보름달: 보송보송 무한그램 ..

동시 2024.12.02

열대야/ 최지원

열대야     최지원    여름 나무는  쨍쨍 햇살 실로  초록 그늘을 짠다   더위에 지쳐도  짜고 또 짜다가   늦은 밤까지  매미 알람 켜놓고   청청 남아도는  햇살 실로  초록 그늘을 짠다    -전문-   발문> 한 문장: 2024년 여름은 무더웠다.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려웠다. 기후 위기를 누구나 떠올리게 했다. 가을이 오는 일이 이렇게 반가운 일인가 싶을 만큼. 하지만 이런 극성스러운 올해 여름이 앞으로 다가올 여름 가운데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말이 부디 나쁜 뉴스이기를 바라는 바다.  극성스러운 더위만큼 올해 매미도 극성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매미들은 낮에는 쉬지 않고 울다가도 밤이 오면 내일 울 일을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올여름은 매미들도 열대야를 견디기..

동시 2024.12.02

차를 끓이며/ 윤석산(尹錫山)

차를 끓이며     - 손석일 兄에게     윤석산尹錫山    채광창 가까이 겨울은  다가와  머무른다.   손석일 형이 보내 준  작설차, 눈 녹은 모악산 기슭에서  참새 혀만큼 내민 잎들을 따다  여름내 그늘에서 말린  작설차,  스스로 체온을 덥히며  방 안 가득히 번지는 온기가 된다.   언 손, 부르튼 손.  그러나 부르튼 시가 되지 못하는  전라도 김제군 모악산 기슭.   채광창 가까이 부러진 햇살  철이 든 아이마냥  겨울은 절룩이며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전문(p. 208)   * 윤석산 선생님께// 전북 김제군 백구면이 저의 출생지입니다. 돌계단 몇 개를 밟고 올라가 대문을 열면, 무덤 몇 기基와 그 무덤들을 에둘러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는데요. 늘상 거기 올라서서 (저 멀리) 모악..

책/ 윤석산(尹錫山)

책     윤석산尹錫山    나이가 들고 보니 젤로 무거운 게 책이다.  한 두어 권만 가방 안에 있어도  어깨가 한쪽으로 기운다.   이 무거운 책들 무거운 줄도 모르고  평생을 들고 다녔으니  어지간히 미련한 사람이다.  그만 외출이라도 할 양이면 손에  으레 책 한두 권 들고 나가야 했던 젊은 시절.   지금이라도 무거운 줄 알았으니 다행이다.  무거운 것은 다먄 무게만이 아니다.  책 안에 담긴 말씀들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 줄  이제야 조금씩 알아 가고 있다.   그러나 다만 담겨진 말씀만이 아니라  그 말씀 제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더 무거운 일임이 요즘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래서 함부로 책 들고 다니기가  더욱 거리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책 짊어질 어깨 점점 좁아진다.     -전..

담수폭포/ 정다연

담수폭포      정다연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사람이 건넨 말이  깊이로 고일 때  높이로 솟을 때  피가 멎었다는 걸 알았어   멎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테니까   아침에는 네가 말해준 적 있는 문장을 주석에서 찾아냈어   주석은 본문을 설명하지 않았고 본문은 있는 그대로 충분해 보였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공중전화 부스가 사라진 공터에 들고양이들이 몰려들듯이  조각조각 깨지고 나서야 병동의 창문이 구름을 담을 수 있게 되듯이  뒷목의 단추가 또렷하게 불러내는 손길도   상관없는 날이 오고야 말지   나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다른 사람의 자질구레한 일상과  정착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로 흘러가는 하루  무심함   너를 좋은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