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논문>
상대 가요의 서정적 이해
공무도하가를 중심으로
윤석산尹錫山
1
우리의 시문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늘 논의의 첫 대상이 되고 있는 작품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혹은 「공후인」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이 그 논의의 첫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시대적으로 가장 윗대에 제작되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이 우리 서정시의 한 전형을 이해하는 몇 개의 매우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으며, 같이 전승되는 산문 기록 역시 중요한 서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무도하가」 같은 상대 시대의 시작품은 이들 작품들을 뒷받침하는 여러 문헌적인 자료의 영성으로 인하여 그 창작 시기 또는 작가의 문제, 나아가 창작 동기 등, 그 문헌적인 부분에서부터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이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이러한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공무도하가」 또는 「공후인」으로 불리는 이 노래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중국 문헌인 진晉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이다. 또한 우리 문헌으로는 『고금주』를 인용, 전재한 『해동역사海東繹史』가 있으며, 후대에 『청구시초靑丘詩抄』, 『대동시선大東詩選』,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에 이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p. 339)
이 노래는 여타의 상대시가와 마찬가지로 신화 혹은 전설의 성격을 지닌 산문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공무도하가」와 같은 상대시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산문 기록은 그 주요한 길잡이가 되어왔다.
공후인은 조선땅의 뱃사공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나루터에서 배를 손질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술병을 끼고 거센 물결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그 아내가 따라가며 말리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여 이윽고 그는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때의 그의 아내는 공후를 뜯으며 노래하기를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기어이 물을 건너고 있네
물에 빠져 죽으니
이 일을 님이여 어찌할거나
하는 소리가 너무나 처참하더니 노래가 끝나자 그 여인도 또한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자고子高가 집으로 돌아와 이러한 사연을 아내인 여옥에게 말해주니 여옥도 슬퍼하며 공후를 뜯으며 그 노래를 다시 한번 그대로 불러 보았다. 그리하여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옥은 이 노래를 이웃에 사는 여용麗容에게 전해주었고 노래의 이름은 공후인이라고 하였다. (p. 340)
( 箜篌引者 朝鮮津卒藿里自高妻 麗玉所作也 自高晨起刺船 有一白首狂夫 被髮提壺 亂河流而渡 其妻隨而止之 不及 遂墮河水死 於是援箜篌而歌曰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聲甚悽愴 曲終 亦投河而死 自高還以語麗玉 麗玉傷之 乃引箜篌寫其聲 聞者莫不隨淚飮泣 麗玉以其曲 傳鄰女麗容 名曲箜篌引) (p. 340-341)
이렇듯 산문 기록과 함께 전해지고 있는 본 작품은 최초로 실린 문헌이 중국의 문헌이라는 점과 함께, 산문 기록 중에 나타나는 '조선진朝鮮津'의 '조선'이 한반도가 아닌 중국 직례성直隷省 영평부永平府 노용현盧龍縣 근처의 지명이라고 고구하여1) 본 작품은 우리의 시가 아니라 중국인이 썼고 부른 노래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백李白, 온정균溫庭筠 등 중국의 역대 시인들에 의해서 인용되어 불렸으며, 이들이 「공무도하가」 속의 조선진을 황하 유역으로 설정하여 시에 인용했다는 점을 들어 이 시는 중국의 작품이라고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있기도 하다.2) 즉, 조선진의 위치가 조선 땅이냐 중국 땅이냐 하는 것이 바로 이 노래의 국적을 가름하는 관건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나타나고 있는 기록인, '조선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 조선현이다.(按朝鮮卽漢詩浪郡朝鮮縣也)'라는 풀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공무도하가」 산문 기록 중의 '조선'은 낙랑군 조선현이며 연재의 대동강 남쪽 토성리土城里라고 지정하기도 한다.3) 그러나 이 '조선'을 한반도 안의 낙랑군 조선현으로 고구하고 있으면서도, 이 작품의 작자로 이야기될 수 있는 곽리자고의 처인 여옥은 중국인 요기膋妓 출신의 여인이며, 곽리자고 역시 낙랑군 조선진에서 나루의 일을 보는 한인漢人 하급 군인이라고 해석하여, 한대漢代에 낙랑조선에 거주한 한인(漢人, 중국인)의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4) (p. 341~)
또한 이와 같은 「공무도하가」의 국적 문제는, 그 작자로 이야기될 수 있는 여옥과 그의 남편 되는 곽리자고에 대하여, 조선 진졸인 곽리자고는 한나라에서 온 군졸이지만, 그 처인 여옥은 당시 낙랑군의 지방민으로서 우리나라 사람이므로, 이 작품은 마땅히 우리의 고대시가로 다루어야 한다.5)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조선'의 위치에 관해서도 중국 직례성直隷省 내의 조선현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 조선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중국 민족이 아니며, 이곳에서 고조선 이래로 한인의 잔류민들이 조선성을 독자적으로 형성한 채 6세기까지 존속해 왔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본 노래와 산문 기록은 중국인의 것이라는 추정에서 구속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는6) 절충설도 나오고 있다. (p. 342~)
그러나 이어령 교수의 이야기와 같이, 모든 문화는 거슬러 올라갈수록 미분화 상태가 되기 때문에 '네 것'이냐 '내 것'이냐를 따지기 힘들 때가 많으며,7)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의 문헌인 『해동역사』, 『청구시초』, 『대동시선』, 『열하일기』 등에 기재되었고, 연암으로 하여금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는 점을 들어 「공무도하가」가 순연히 중국인의 것이라는 추정에 구속될 수만은 없다는 김학성 교수의 주장,8) 또 곽리자고가 그 성씨(姓氏며 지명 등을 나태내는 것이라면 우리의 성씨나 지명이 되지 못하고 중국의 그것이라고 해도 그의 처인 여옥이 중국인이라는 확신이 없는 한 「공무도하가」는 중국작품으로 국한시킬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p. 342)
1) 崔信浩, 공후인(異考) 「동아문화」10,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1971)
2) 李鐘出, 上代歌謠의 시가적 양상 (「언어문학」1집, 조선대, 1975)
3) 徐首生, 공후인 연구(「한국시가연구」, 형설출판사, 1974)
4) 池浚模, <공무도하> 考正(「국어국문학」62, 63, 국어국문학회, 1973)
5) 金鉉龍, 公無渡河歌 考證의 몇 문제(「성봉 김성재 박사 회갑기념 논문집, 1977)」
6) 김학성, 공후인의 신고찰(「한국고전시가의 연구」 원광대학교 출판부, 1980)
7) bagsi(mongo語) · 李御寧. 공후인(「고전의 바다」, 현암사, 1977)
8) 김학성, 앞의 글
2
글의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상대시가는 신화 혹은 전설의 성격을 띠고 있는 산문 기록과 함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산문 기록은 매우 주요한 길잡이가 된다. 그러므로 이 산문 기록을 중심으로 상대시가의 성격은 물론 작가, 창작 동기, 시대적 배경 등을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들 기록과 같이 신화적 혹은 설화적 성격을 띠고 있는 기록을 문면 그대로 해석하고 결정을 내릴 때 빚어지는 오해는 상당한 것이 된다. 때문에 이들 산문 기록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으로 보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이들 산문의 행간에 숨어 있는 상징적이며 기호적인 의미를 찾아 해석하고자 하는 태도가 바람직스러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공무도하가」에 있어서, 산문 기록을 산화적 맥락에서 이해한 것으로는 정병욱 교수의 글이 있다. 즉 이 산문의 주인공인 백수광부를 정병욱 교수는 서구 신화의 디오니소스와 같은 주신主神으로 비견했으며, 그의 처를 강물의 요정 님프의 악신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이들 주신(酒神과 악신(樂神에 얽힌 신화가 후대에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하나의 설화로 전성轉成된 것이라고 보았다.9)
또한 이러한 견해에 비하여 김학성 교수는 백수광부의 '백수白首'가 알타이 어족에서 박수覡에 해당하는 paxi(godldi語), bagsi(mongo語), bagsi(uighar語), fiksi(mantha語) 등과 音以關係에 있는 것에 주목하고, 이를 입신 과정에 있는 미숙련의 무부(巫夫, 박수)로 상정하여 무부의 주능실패(呪能失敗)로 인한 비극적인 파멸담에 관한 설화와 그에 얽힌 가요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설화는 주술능력에 실패한 무부의 비극적 파멸담인 것으로 보아 샤먼의 능력이 현저히 약화된 그러한 시기의 사회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10) (p. 342-343)
이렇듯 백수광부를 미숙련의 무부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조동일은 무당의 권위가 사회적으로 추락된 그러한 시대에 황홀경에 든 무당이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권능을 확인하는, 그러한 의식을 행하는 무당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식에서 무당은 실패를 하게 되고 따라서 새로운 권능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그 자리에서 그 아내인 무당이 공후를 타면서 굿 노랫가락에 얹어 넋두리를 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11)
이렇듯 「공무도하가」는 이와 함께 전승되는 산문 기록에 의해서 단순한 하나의 시가가 아니라, 매우 다양하며 폭넓은 신화, 또는 고대 사회의 의미심장한 시대적 배경을 지닌 시가로 우리에게 오늘 인식되며 또 이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산문 기록 중의 주인공인 백수광부와 그의 처는 바로 시가 속의 화자로 또는 대상 인물로, 나아가 시가 속에 표출되고 있는 상황이나 사건은 단순한 이별이나, 이별의 슬픔이 아닌 무당의 의식, 또 실패한 무당의 시대적 좌절로 전환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즉 「공무도하가」에 나타나는, '님은 마참내 물을 건너고 있네(公竟渡河)'하는 구절은, 사랑하는 님이 물을 건너 떠나고 있다는 단순하며 현실적인, 그러므로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시적 상황이 아니라, 황홀경의 상태(ecstasy)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 죽음의 초극이라는 '이상적인 것'12)을 실현하려는 종교적인 의식을 표출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시기는 함께 전승되고 있는 산문 기록에 의해서 그 해석이나 이해 의도가 다양하고 폭넓어질 수 있지만, 오히려 시라는 예술이 지닌, 무궁한 생명력, 무한한 해석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공감의 세계를 '좌절한 주신酒神' 또는 '무부巫夫의 형식' 등으로 제한 당하고 차단되는 경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가가 지니는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시적 이미지는 몇 개의 틀 속에 귀속된 채 유형화된다는 위험성마저도 없지 않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p. 344.)
그러므로 이러한 탐구는 오히려 문헌에 의존하는 축자逐字 해석이 지닌 한계와 같이, 또 다른 면에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전승되는 산문에 있어서도, 산문 속의 일련의 사건이 무부의 종교적 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어, 산문 기록 전부를 신화적 혹은 무속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 선뜻 받아들려지지 않는다. 즉 가장 두드러진 것이 되는, '백수' 또는 '광부' 또는 '피발제호被髮提壺', 나아가 '남편이 익사한 후 공후를 뜯으며 노래한다(援箜篌引歌)'는 부분 등이 위와 같이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는 상징적, 기호적 의미를 띤 것이라면, '물을 건너려는 남편을 말리는 여인의 모습(其妻隨而止之)'이나, 노래를 끝마치고 물에 빠져 역시 여인이 죽었다(曲終 墮河而死)'는 이야기, 나아가 후일담과 같은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聞者莫不隨淚飮泣)' 등의 이야기는 매우 일상적이며, 위와 같은 비장한 해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장해 요소로 산문 중에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신화 또는 설화는 어느 시대, 어느 한 시점에 이룩된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들 이야기는 역사라는 긴 시간의 강물을 따라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며, 그러므로 어느 부분은 역사의 강물과 함께 더욱 신이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고, 또 어느 부분은 극히 일상적이며 상식적인 요소로 변모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자로 기록되어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신화나 설화 등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모되고 또 정련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저 강의 하구에서 주워 든 작은 조약돌 하나를 통해, 어느 계곡의 상류에 있음 직한 울퉁불퉁한 바윗돌의 모습을 찾는 것과도 같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설화는 오랜 전승의 시간 속에서 깎이고 혹은 첨가되어 나름대로의 구조와 틀을 이루어 문자로 정착되어 오늘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공무도하가」와 함께 전승되고 있는 산문 기록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무도하가」의 제작 동기나 성격 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닌 부분도 있겠고,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산문 기록을 바탕으로 시가의 성격을 추론해 나갈 것이 아니라, 시가를 중심으로 하여 산문의 내용을 분석해 보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으로 생각한다.
편의상 시작픔을 다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p. 344-345)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기어이 물을 건너고 있네
물에 빠져 죽으니
이 일을 님이여 어찌할거나
물을 건너려는 님과 물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여인에 의해서 빚어지는 갈등에서부터 이 시가는 시작된다. 그런가 하면 끝내 님은 물에 빠져 죽게 되고, 님을 잃은 여인은 넋을 잃고, '이 일을 어찌할거나' 하는 통곡으로 끝나게 된다. 이와 같은 시의 내용을 산문 기록 역시 똑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여인은 남편이 죽게 되자 공후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는, 노래를 마치자 역시 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수긍이 갈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경황 중에 공후라는 악기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얼른 수긍이 가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산문 기록의 부문에 대하여 장덕순 교수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이해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노래는 나루터에서 남편이 몰에 빠져 죽은 것을 보고 그 아내가 슬피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부른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그때 무슨 경황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초상집에 가면 울면서 넋두리를 하듯이 그 경우도 통곡의 외침 소리에 간간이 사연을 늘어놓는 것이었겠지요.13)
즉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공후를 타며 여인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이야기를 보다 극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한, 윤색 혹은 첨가된 부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p. 346~)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산문 기록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흰 머리(白首)', 미친 사내(狂夫)' 또는 '머리를 헝클린 체 술병을 들고(被髮提壺)' 등의 기록도, 기실 산문 기록 중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신분이나 성격을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인공이 격랑의 물결을 건너려고 하는( 亂流而渡) 심리적인 상태, 즉 왜 그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파도치는 강을 건너야 하는가 하는 사내의 상황과 심리적 상태를 보다 극적으로 암시하거나 상징시킨 표현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파도치는 강물을 건너려는 그 자체, 그것도 배도 타지 않은 채 건너려는 것은 극히 비정상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검은 머리가 아닌 '흰 머리(白首)'일 때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행위는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머리를 휘날리며 술병을 든 채(被髮提壺)' 건너려는 모습에서 더욱 이러한 모습이 분명해진다. 술은 곧 물을 건너려는 내적인 욕구의 또 다른 상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공무도하가」라는 시를 중심으로 산문 전체를 조견할 때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이 시의 시적 분위기는 지극히 인간적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여인의 비탄의 절규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 그러한 것이다. 즉 시가의 내용에서 우리가 감지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인 '이별의 아픔', '님의 죽음에서 받게 되는 슬픔'인데 반하여 그 산문의 기록은 '무당의 종교적 의식' 등의 보다 엄숙하고 격식화된 그러한 내용이 된다. 그러므로 이는 왠지 어울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공무도하가」의 산문 기록은 그 시를 중심으로, 이를 조견해볼 때 시가 지닌 성격, 또는 시의 주조를 이루는 정서 등과 어울릴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무분으로 나눠짐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곧 설화의 형성과정에서 그 이야기의 효과를 보다 높이기 위해 첨가되었거나 암시적으로 윤색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동시오ㅔ 이와 같은 암시적 상징적 부분을 시작품을 중심으로 해석할 때 그 시는 몇 개의 제한된 틀에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넓은 인간의 포편적인 상상력 안에서 그 시적인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p. 346-347)
9) 鄭炳昱, 고대의 가요(「한국문화사대계」,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967) pp. 779-182
10) 김학성, 앞의 글, pp. 193~196
11)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 (지식산업사, 1982)
12) 김학성, 앞의 글
13) 鄭炳昱, 앞의 글
3
「공무도하가」는 인간의 가장 본원적 정서를 이루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우리 최초의 서정시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그런가 하면, '물' 또는 '강'이라는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소재를 중심으로 '님과의 이별', 또는 '님의 죽음'을 노래한 전형적 서정시의 한 모습을 지닌 노래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가에서 '물' 또는 '강'은 많은 이별가의 시적 대상이 되어왔다. 정지상鄭知常의 시가 그렇고, 「서경별곡」이 그렇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 등장하고 있는 '강물'도 역시 이별의 상징이며 동시에 죽음의 상징이 된다. 강이란 공간적으로 보면, 이곳과 저곳을 갈라놓은 단절의 한 구체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강은 인간에게 있어 늘 이곳저곳으로 갈라놓는, 그러므로 건널 수 없는 좌절의 구체적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늘 인간에 의해서 언제나 건너야만 하는 숙명의 대상이다. 즉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욕구, 다시 말해서 자신이 지고 있는 현실적인 한계와 질서를 뛰어넘고 또 초월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의 대상이 바로 '물'이며 '강'이 된다. 그러므로 '물' 또는 '강'은 언제고 인간의 의식에서 '충만한 것'이 된다. 이러한 강을 건너고자 하는 욕구는 현실에서 볼 때 늘 싱싱한 모험 또는 위험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상을 건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모험이며 새로운 삶에의 진지한 도전이기도 하겠지만, 현실의 이쪽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며 슬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무도하가」는 강을 건너고 있는 입장에서 부른 노래가 아니라, 현실의 이쪽 건네 보내고 있는 사람의 위치에서 부르고 있는 노래이다. 따라서 이에 나타나고 있는 '물' 또는 '강'은 견디기 어려운 이별의 슬픔이며, 헤어날 수 없는 죽음의 상징으로 이 시에 등장하고 있다. (p. 348~)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공무도하가」가 지닌 서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만약 이의 시점이 물을 건너는 따라서 이 시는 지극히 한국적 서정의 원천인 한을 바탕으로 한 서정시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되고 있다.
한恨은 곧 하고 싶은 욕구와 이룩될 수 없는 현실이 서로 상충됨으로 해서 야기되는 정서의 한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이루고 싶은 욕구가 늘 열세에 처해 있음으로 더욱 상승되고 있는, 그러한 정서이며, 또한 이룩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의 표출이기도 하다. 「공무도하가」는 첫 구절에서부터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님은 물을 건너지 마오/ 그러나 마침내 님은 물을 건너네.' 즉 물을 건너지 말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님은 마침내 물을 건너고 만다. 그러므로 '물을 건너지 마오.'라는 울부짖음은 건너지 못하게 하는 적극적인 저지이기보다는 '건너는 님'을 붙잡지 못하는 화자의 안타까운 절규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물을 건네 보내는 화자에게는 사랑하는 님을 죽음으로 보내야 한다는 참담한 현실만이 남게 되고, 그 현실에의 인식이 바로 이 시의 주조인 비극적 한은 시 속에 구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의 문제는 행을 거듭하면서 더욱 강하게 시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보는 바와 같이, 물을 건너게 되는 '님'은 이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마침내 님은 물을 건너네./ 물에 빠져 죽고 말았네.' 현실의 이쪽에서 강의 저쪽으로 보낸다는 것은 곧 이별이며 죽음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에 있어서 이별과 죽음은 어쩌면 같은 차원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님이 물에 빠져 죽었든 혹은 강을 아주 건너가 버렸든, 이곳 현실에서 볼 때에는, 남게 되는 것은 떠나 보낸 한, 바로 그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하듯이 이 노래는 '님의 익사'에 이르러 그 비극적 절정에 이르게 되고, 비극적 절정과 함께 현실의 앞을 가로막고 흐르는 물과 같이, 그 물의 깊이와 같이 시 전반에 비극적 한恨을 더욱 깊이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p. 348-349)
「공무도하가」의 끝 구절을 보게 되면, 님의 떠남, 또는 죽음을 잊지 못하는 절규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네./ 이 일을 어이할거나.' 하는 지극히 빠른 체념으로 떨어져 버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빠른 체념의 종언에 관하여 정병욱 교수는 매우 탁월한 해석을 붙이고 있다. 신라시대의 「처용가」의 '앗아날 어찌하리오', 또는 고려가요인 「청산별곡」의 '잡사와니 내 엇지 하리잇고', 그리고 이조 시조에서 흔히 보는 종장의 ' 어떠리'라는 끝 구절을 관류하는 일련의 전통적 표현의 양식, 즉 감탄과 애상과 체념과 회의가 한데 엉킨 채 끝나는 전통적 원류가 되고 있다.14)고 지적하고 있다. (p.350~)
「」 「」 「」 『』 『』 『』 『』
14) 鄭炳昱, 앞의 글
<다음에 계속/ 총 페이지 339-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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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문인 보고서 2 『시인 윤석산』 '주요논문' 에서/ 2022. 9. 28. <화성시립도서관> 펴냄/ 비매품
* 윤석산尹錫山/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당선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바다 속의 램프』『온달의 꿈』『처용의 노래』『용담 가는 길』『적 · 寂』『밥나이, 잠나이』『나는 지금 운전 중』『절개지』『햇살 기지개』등, 저서『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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