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불멸성 그 적막한 여백들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 번역 : 정선아
사랑과 나 사이에, 이젠 죽음의 납빛 흔적뿐, 곧 사라질 침묵 자국뿐.
사랑과 나 사이에, 이젠 고뇌의 거친 주먹, 꽉 쥔 얼어붙은 주먹뿐, 사랑과 나 사이에, 이젠 패배의 골짜기에 나의 길을 터 나가는 핏방울뿐. 그 바닷가에는, 감지할 수 없는 시들한 추억이 모래 알알이 맺힌 그곳에는, 소리 없고 자세한 형태 없는, 하얀 얼굴을 한, 하얀 인물들, 하얀 몸들, 하얀 고통, 거의 하얀 회한, 하얀 생각들이 거대한 중력에 실려 오간다, 그 소용돌이 속에 조금씩 무색이 되어 가는 나, 바위에서 바위로 폭포처럼 내려오는 어떤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 "너 여기 그림자 없는 끝없는 망각의 사막에 있다. 여기서는, 감동을 주는 그 어떤 활자 공간도 파고들지 말라. 여기서, 사유는 제 안에 무덤을 판다. 여기서는, 내면의 날개들이 파닥이며 출발의 불길 타오르는 가슴을 찢는다. 여기서, 고독의 의미는 기호에서 현실이 되었다."
북쪽으로 해변을 둔 난바다가 잠잠하다. 파도 능선은 굳어 좀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 거기서는, 몸집 무거운 이들 모두 물결 위를 쉽게 걸을 수 있을 게다. 동녘에서, 찬란한 하늘 띠 위로 눈부시게 씁쓸한 욕망이 떠오른다. 서쪽에서는 쭈그러든 주름진 시도들이, 아직 다 꺼지지 않은 채, 연기 피어오르는 온갖 환멸이, 거칠게 내몰린 슬픔이, 한없는 절망감이 저물어 간다.
행운의 소문이 사방에 슬그머니 스며든다.
그러나 급작스런 파산이라는 재난과 굼뜬 궁핍이 을씨년스런 빛으로 산맥을 비춘다. 황금이 그 산체山體의 혈관을 돈다, 맑은 물과 진한 피처럼, 쾌락에 흘리는 침처럼 황금이 방울져 떨어지는 손가락 끝까지, 황금, 황금빛 강들, 자유의 선로들, 부드러운 사랑의 빛. 흔들린 두 손, 둔탁한 소리 들린다. 궁핍의 수치스런 신음, 피 묻은 칼날 끝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마련된 묘지마다, 무덤 위에 가난의 때 찌든 거품이 인다. 여기서는, 불멸의 가난을 싣고 가는 대상隊商이 구석구석 가로지르는 이 사막에는, 사랑과 나 사이에는 이제 더는, 불타는 고통의 웅덩이와 불운의 아뜩한 꼭대기뿐.
-전문-
해설> 한 문장: 절대 현재는 시인이 가 닿고자 하는 사물의 본질 또는 절대 근원에 견줄 수 있을 그 무엇일 텐데, 그것은 도달 불가능하고 지각 불가능하며 그 구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비록 환상일 뿐이라 해도, 우리는 감각 현실이라는 반영체 없이는 본질 된 절대 현실을, 곧 실재를 인식할 수도, 그것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다. 그 반영체가 주는 환상 없이 직접 맞닥뜨리는 참된 것이란 결국 무無이기 때문이다. 감각 현실은 비록 참된 것의 반영체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주는 환상은 그에 휩쓸려 길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고 시인은 강조한다./ 사물의 본질, 곧 실재와 단절된 채 감각 현실에 얽매인 자에게 존재 결핍은 태생적이다. 이 불완전한 존재 상황을 두고 그는 말한다. "진정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사랑하는 것에만 구속당하는 것이라고"(LB, 688). 중요한 것은 덧없는 삶에 자신을 어떻게 비끄러맬 수 있느냐는 문제다. 그의 시에서 마주치는 형상과 무형 사이에서 흔들리는 '흐린 존재들', 구름 · 연기 · 그림자와 같은 무정형, 바람 · 공기와 같은 형상 아닌 형상에는 이 존재론적 물음을 두고 고심한 흔적이 묻어난다. 이 형상들이 내비치는 바깥 · 죽음 · 무한은, 지각 불가능한 탓에 두려운 미지가 아니라, 들어가야 할 존재 근원으로 인식된다. 감각 현실의 한계 너머로 길트기는 형상과 무형 사이에 가로놓인 벽을 허물고 형상과 무형이 곧 한 몸에 뿌리 둔 것임을 드러낸다. (p. 210-211) (정선아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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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베르디 시선』 2019. 7. 17. <지식을만드는지식> 펴냄
* 피에르 르베르디 (Pierre Reverdy, 1889~1960, 71세)/ 프랑스 남부 나르본 출생,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20세기 전반에 등장했다. 프랑스 현대시에서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보적인 목소리를 지킨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 정선아/ 이화여대 외국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랭보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 취득, 1950년대 이후 프랑스 현대시와 한국 현대시에 관심을 두고 '현대시에 나타난 해체 양상과 서정에 대한 반성', '언어 예술의 투명성과 불투명성 : 예술 사회학적 관점에서' 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으며, 현재 이화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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