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지평선: 르베르디 / 번역 : 정선아

검지 정숙자 2020. 1. 10. 20:47

 

 

    지평선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 번역 : 정선아

 

 

  내 손가락이 피 흘린다

  그것으로

  나 네게 글을 쓴다

  나이 든 왕들의 통치는 끝났다

  꿈은 천장에 매달린

  무거운

  한 조각 햄이고

  네 엽궐련의 재는

  불빛을 오롯이 품고 있다

 

  굽이진 길목에서

  나무들이 피 흘린다

  암살하는 태양이

  피로 물들인다 소나무들과

  습한 초원을 지나는 이들을

 

  첫 올빼미 잠드는 저녁

  나는 취해 있었다

  늘어진 내 사지가 거기 매달려 있고

  하늘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

  나 아침마다 눈을 씻는 하늘

 

  붉은 내 손은 하나의 낱말

  목멘 흐느낌이 떨리는 짧은 호소

  압지 위에 흘린 피

  잉크는 거저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세계 끝에서

  멀리멀리 가는 검은 시냇물들 사이의

  늪들 그 얼룩 위를 나는 걷는다

  그 끝에서 들리는 소리는 샘물 또는 내 심장에서 흐르는 핏방울

 

  나팔 소리가 창공에서 비상소집을 알린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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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베르디 시선』 2019. 7. 17. <지식을만드는지식> 펴냄

  *  피에르 르베르디 (Pierre Reverdy, 1889~1960, 71세)/ 프랑스 남부 나르본 출생,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20세기 전반에 등장했다. 프랑스 현대시에서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보적인 목소리를 지킨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 정선아/ 이화여대 외국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랭보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 취득, 1950년대 이후 프랑스 현대시와 한국 현대시에 관심을 두고 '현대시에 나타난 해체 양상과 서정에 대한 반성', '언어 예술의 투명성과 불투명성 : 예술 사회학적 관점에서' 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으며, 현재 이화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