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철주_ 시간의 먹이들에게(발췌)/ 액체 인간 : 신용목

검지 정숙자 2019. 9. 27. 02:07

 

 

    액체 인간

 

     신용목

 

 

  엄마는 뭐라도 담아놓아야 한다며

  물을 부었습니다

 

  그렇다면 꽃잎을 따 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깨졌을 때

  마루에 흥건할 물과

  거기 떠다닐 날카로운 파편들,

  그건 그냥

 

  내가 늘 하는

  안 좋은 상상,

 

  어쩌다 혼자 남아 쳐다보면 항아리는 자꾸만 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제 속을 보여줄 것 같았습니다

 

  엄마가 몇 번 흔들쳐 수돗가에 엎어두었던 날, 나는 검게 뚫린 구멍에서

  끝없이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건 그냥

 

  상상이었으면 했는데,

 

  시멘트 바닥에 떨어뜨리자 구멍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둠도

  깊이도

 

  내가 늘 하던 상상도

 

  항아리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깨진 조각들을 이어붙였습니다 이가 맞지 않아 사이가 뜨고

  몇 조각은 아예 찾지도 못했지만,

  항아리는 완성되고

 

  엄마가 하던 대로 물을 부었습니다

 

  항아리는 금방 우는 얼굴이 되었지만 웬일인지 나는 얼굴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전문-

 

 

   ▶ 시간의 먹이들에게(발췌)_ 이철주

  「액체 인간」에서 이러한 '물의 시간'은 그릇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진술된다. 그릇은 인간의 허기와 닮았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가두려 하고, 사라질 것을 품에 안는다. 텅 빈 그릇은 하나의 구멍이며, 구멍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해갈될 수 없는 갈증은 그릇이 깨어진 이후에도 남아 날카로운 파편들로 허공을 찢고 가른다. 「액체 인간」은 그릇에 대한 이 오래된 상상의 궤적을 따라가지만 마지막에 작은 반전이 일어난다. 그릇이 아니라, 깨진 그릇에라도 담겨 안간힘을 쓰고 버티려는 물들이 바로 인간이라는 전언. 처음부터 인간은 온전한 그릇에 담긴 적 없으며, 구멍이 숭숭 뜷린 그릇에 담겨 끝도 없이 새어나가는 자신을 무한히 바라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이 불가항력적 진술은, 인간을 하나의 울음으로 오직 울음 속에서만 풀려나는 오래된 침묵으로 규정짓는다.(p. 48.)

 

 

   --------------

  *『서정시학2019-가을호 <신작 소시집/ 신작시/ 작품론> 에서

  * 신용목/ 200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나의 끝 거창』등

  * 이철주/ 2018년 《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