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비평론>
'에세이 비평'을 위하여
전해수
또다시 난독亂讀으로 가득 찬 밤입니다. 이 책 저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지금, 당신(시)은 저만치 있습니다. 나는 주어진 글을 시간 안에 써내야 하는 형벌(!?)을 오늘도 감당해야 하지만, 손에 닿은 책들의 활자에 금세 눈이 어두워집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체념하고, 비평가의 운명運命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비평의 순간에 자주 빠져드는 난독 증세를 스스로 막지는 않습니다. 당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의 독서는 자주, 정처定處를 잃고 이처럼 어지러운 것을 우선은 고백해야만 하겠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쓰고 보니 평론가로 등단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2005년 겨울,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송이가 툭, 떨어지던 것을 평생,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 가엾고 흰 것의 하염없는 추락에 잠시 목젖이 시렸던 것 같습니다. 투고한 평론이 당선되었다는, 흐릿한 전화를 받았을 때 왜 하필 눈송이가 내 시야視野에 들어온 것일까요? 당선 소감에 눈雪처럼 뽀얗고 투명한 눈물을 얹었습니다. 기쁨보다는 아릿한 슬픔이 저릿하게 코끝부터 밀려왔던 것입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이 떠올랐던 이유입니다. 'Au revior'(헤어질 때의 인사)가 아니라 'Bonjour'(만날 때의 인사)! 슬픔을 맞이하는 나의 인사에 시는 얼굴을 붉히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습니다.
시를 알게 된 첫 순간이 떠오릅니다. 중학교 2학년, 처음 써본 시「창窓」으로 우연히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후, 시인이 될 거라 막연하게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창'의 안과 밖의 세계를 이어주는 트로이카(내가 기억하는 그 시의 내용입니다)가 현실에서도 나를 당신께로 데려다 줄 것이라 여겼던 걸까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시인을 꿈꾸며 대학에서, 대학원에서, 긴 시간 당신의 주변을 서성였습니다. 언젠가는 저 '창'을 넘어가리라 다짐하며 닫힌 창의 안쪽 너머의 바깥쪽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란데 나는 당신과의 일정한 그리움의 거리를 두어야 하는 평론가가 된 것입니다. 2005년의 겨울, 눈송이가 툭, 떨어지던 그날, 그렇게 첫사랑을 떠나보내는 의식을 치르며, 오래도록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이란 '거리'임을, 숙명처럼 당신과의 일정한 '거리'를 갖게 된 비평의 시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또렷한 슬픔을 마주하며, '나에게' 인사를 했던 것일까요? Bonjour!(안녕) 내게로 온 슬픔(비평의 시간)이여!
나의 비평은 결국, 시로 휘돌아가는 방향성을 지닌 것이었기에 '에세이 비평'은 그때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시를 사랑하는 방법은, 당신을 날카롭게 베어내는 일이 아니라, 내게는 그저 당신을 품는 일이어서 '에세이 비평' 외에 달리 비평의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마음을 새겨 쓰는 '비평', 당신의 뜻을 바르게 알아채고 읽는 '비평'이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나의 비평을 '에세이 비평'으로 여깁니다. 비평의 순간,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고쳐 입는 그 설레는 마주함을 한껏 느끼며 '시심詩心'에게 차분히 다가가는 것, 나에게는 그 떨림이 비평의 시작점임이 분명하니까요.
두 권의 평론집을 발간하며 가슴에 새긴 마음들을 다시 열어 봅니다. 첫 번째 평론집 『목어와 낙타』(2013)는 외로움의 감정이 귓전을 사각거리는 바람 소리로 남아 있습니다. 바다를 유영하던 기억을 지우고 지붕 끝에 매달린 저 목어木魚의 풍경 소리를 듣습니다. 또한 저벅저벅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느리고도 쓸쓸한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나의 비평은 '흔적'이지요. 말(언어)의 소리들이 사흘 밤낮으로 시끄럽게 마음을 오가던 '흔적' 말입니다.
두 번째 평론집 『비평의 시그널』(2018)은 비로소 내가 쓴 글들이 '에세이 비평'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비평의 날카로운 눈과 입과 순"의 것들은 내개는 시인을 향한 '시그널', 그 정도라면, 충분햐 보였습니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실에서 '목어'는 속이 텅 빈 나무지만, 과거의 시간 속에서는 어떤 생명의 모습으로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물길을 가르고 있었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육체와 정신, 생명과 그 시간의 흐름이 '목어'란 단어에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낙타'란 말은 낙타가 바라보았을 광활한 사막과 뜨거웠던 시간이 생의 욕망과 허무를 동시에 안겨주는 것 같아서 못내 서럽다. 이 두 단어로 상상되는 다의적 의미들이 첫 번째 평론집을 펴내는 내 심정이자 소론所論을 대변해줄 터이다.
- 첫 번째 비평집 『목어와 낙타』(2013) 머리말에서
바람의 눈과 입과 손은 어디에 두고 시그널(signal)인 것인가. 텍스트와의 대화, 그것을 나는 '시그널'로 명명해보고자 했다. 함께 대화를 나눈 텍스트들은 아름답고 간절했다. 간절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간절함이 없다면 문학은 오래 존재하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기교에서 오지 않고 진정성에서 온다. 진정성이 없는 텍스트는 결코 간절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저 궁핍한 세계의 시간 속에서 만난 애달픈 시와 시인이여. 나에게 시그널을 보낸 시와 시인들에게 다시 비평의 시그널을 전한다.
- 두 번째 비평집 『비평의 시그널)』(2018) 머리말에서
특히 『비평의 시그널』은 당신과의 접신接神을 바라는 나의 수신호手信號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대화'를 했던가요? 결국 '대화'에는 다다르지 못한 '시그널'만이 '독백'처럼 다시 '시그널'로 되돌아옵니다. '에세이 비평'을 통해 가능한 '시그널'입니다.
『비평의 시그널』발간 후, 반드시, 생전生前에, 아름다운 비평문 한 편을 꼭 쓰리라 바라게 된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어쩌면 15년간 문학의 언저리에서 비평이랍시고 써온 나의 글이 한낱 에세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느껴왔기에, 나에게는 이런 각오 혹은 포부는 상당히 뜻밖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의 나는, 나의 비평이, '에세이 비평'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에세이라니! 비평의 금기禁忌라며 혹독하게 나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평론가가 상당할 것 같습니다(이런 비판은 결국 동료들에게서 더욱 가혹한 법입니다). 그만큼 비평에는 '에세이'라는 수식어가 걸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에세이 비평에는 비평의 자유로움이 숨골을 터줍니다. 그것은 기존의 비평의 형식과는 다른, 텍스트 내면의 스밈을 가능하게 하는 1인칭 주체의 자유입니다.
근거가 미약하여(기댈) 등을 수소문해 봅니다. 『시인동네』2018년 10월호에 실린 최진석의 글이 있습니다. 최진석 평론가는 루카치의 말을 빌려 "나는 비평이 에세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언명했으며, 가리타니 고진의 말을 빌려 현대 "비평이 근대 분과적 틀에 갇히지 않은 글쓰기"임을 짚어냈습니다. 해당하는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앞선 루카치의 말을 빌어, 나는 비평이 에세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당연히, 여기서 에세이는 수필이라는 장르의 이름은 아니다. 그렇다면 비평은 '5대 장르' 가운데 또 다른 하나에 귀속되어 고유함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고 말 테니까. 시든 소설이든 비평은 다른 장르에 기대어 자기의 존재론적 터전을 마련해서는 안된다고 조언한 루카치의 입장을 새겨보도록 하자. 내 나름으로 이 말을 해석하기 위해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지금 비평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철학이 바탕이 된 이론에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런 추세는 비평가만이 아니라 작가에게도 다분히 목도되는데,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인문학 이론을 공부하고 그에 맞춰 작품을 구상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런 태도나 자세가 문제적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이론에 대한 공부는 현재 세계의 지향을 인식하고, 그 중력의 작용을 이해하며, 거기서 살아가는 대중의 욕망에 호응하려는 태도를 반영하는 탓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공부의 자원으로 호명되는 이론가들, 가령 프로이트나 들뢰즈, 데리다, 벤야민, 하이데거 등은 자신들의 사유를 구축하기 위해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 조이스, 프루스트, 보들레르, 횔덜린 등을 탐독했다는 사실이다. 비평가들 또한 그렇지 않은가? 이론가처럼 쓰기 위해 이론가를 읽다니!
비평가에게 에세이는 일상 산문이나 감상문 수첩이 아니다. 루카치로 시작했으니 루카치로 마쳐 보자. 그가 제안한 에세이란 글쓰기의 형식을 가리킨다. 즉 에세이가 아니라 에세이의 형식이 문제다. -중략- 가리타니 고진은 자신을 비평가라 불러달라고 주문하면서, 비평이 문학이나 철학의 근대 분과적 틀에 갇히지 않은 글쓰기임을 강조한 바 있다. 그야말로 장르와 전문분야를 넘나드는 활동이 비평이며, 그에 종사하는 사람이 비평가라는 것. 그렇다면 똑같은 의미에서 가리타니 고진을 루카치의 에세이스트라 불러도 문제는 없을 듯하다. 그들 모두에게 에세이란 삶과 닮았지만 삶은 아니고 문학을 다루지만 문학 자체는 아닌, 사이-형식을 발견하고 수행하는 비평적인 글쓰기인 까닭이다.
- 최진석, 「비평, 또는 사이 형식의 시간(들)」부분
(『시인동네』2018. 10월호)
최진석의 글은 지금까지 말하려 한 나의 '에세이 비평'과는 용어 사용의 의도가 좀 다르긴 하지만, 그는 루카치의 「에세이의 본질과 형식」에서 추동한, 최근의 '비평의 형식'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위 글에서 최진석 평론가는 이론을 위한 이론의 비평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론을 위한 이론의 비평을 선뜻 버리고, '에세이'의 형식을 비평의 형식으로 재인식한 점이 돋보입니다. 물론 그는 비평이 결국은 '에세이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가 지향하는 비평은 '에세이 비평'이기에 그와 나는 근원적으로는 차별됩니다. 그러나 비평가에게 글쓰기 형식으로서의 '에세이'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학자에게 '비평'의 의미를 부각한 점에서 나는 최진석의 글을 매우 반갑게 여깁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견해를 지닌 모某 평론가의 '비평'에 대한 정의가 이즈음 생각나기도 합니다. 한국 문단에서 활발하게 비평 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는 "비평이란 언어에 대한 언어"이며" "주체는 3인칭"이어야 하므로 "결코 '내(비평가)'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글쓰기"라 언명했습니다. 평론가라면 1인칭의 주관적인 모호한 접근을 피하고 절저히 객관화하여 텍스트를 분석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는 최근의 젊은 비평가들에게 1인칭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평론가가 창작에 대한 동경을 자신읭 글에서 노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질타했습니다. 엄정한 비평의 형식을 강조한 것이지만, 비평을 포함하여 모든 글의 임자는 여전히 글쓴이 즉 1인칭 주체이기에 결국 무든 글은 주관성의 그림자를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이 대목에 이르니 그간 나의 비평에 대한 반성을 피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저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이 비평이, 어떤 형식의 글인지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에세이' 비평'을 주창한다 해도, 나의 문학비평은 일련의 문학소녀 시절의 감상은 아닙니다. 에세이 방식이 표방하는 주체의 밀도를 비평에서도 가능하게 열어두길 바랍니다. 앞서 밝혔듯이 나는, 문학을 꿈꾸던 십 대부터 국문학을 전공하던 이십 대, 대학원을 마치고 강단에서 설핏 문학사를 더듬던 삼십 대를 거쳐 비평의 계단을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미미한 '현재'에도, 어떠한 비평의 순간을 기다리고 대면對面할 것인가를 기대합니다. 나는 상상합니다. 내게 도래했던, 그리고 도래할 것인, 비평의 주체적인 나를! 결국 텍스트에 스민 나의 비평을!
시가 빛나는 비평을 쓰고 싶습니다.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니라 텍스트에 의해 비로소 아름답게 담기는 나의 문장으로 우리의 삶과 문학을 담담하게 읽는 '에세이 비평'을 말합니다. 그러려면 '에세이 비평'이 천대받지 않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에세이 비평'이 하나의 독자적인 비평적 목소리를 지닐 수 있도록 애써보려 합니다. 나의 글이 여전히 비평의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기에, 가던 길을 한걸음 더 가보려 합니다. 그것이 내가 비평을 맞이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p.4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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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2019-7월호 <비평의 순간>에서
* 전해수/ 2005년『문학선』으로 평론 부문 등단, 평론집『목어와 낙타』『비평의 시그널』, 현재 숭실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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