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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배_『물사물 생활자』/ 세상에서 가장 희미한 책

검지 정숙자 2019. 6. 15. 10:56

 

 

    세상에서 가장 희미한 책

 

    신영배

 

 

  밤이 되었다. 창가에 달이 떴다. 그녀와 나는 바닥에 누웠다.

 

  달, 창 바깥쪽인지 안쪽인지 알 수 없다. 달, 나무 위인지 아래인지 알 수 없다.

 

  달 위에 꽃병이 놓여 있는 방

  창문이 기울어지고

  밖에는 길들이 떠오른다.

  지나온 여러 겹의 발을 읽는다.

 

  내가 밟았던 것은 무엇일까.

 

  "희미하게 한 소녀가 보여."

  나는 중얼거렸다.

  "꽃병이 안고 있는 소녀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달이 꽃병을 떨어뜨렸다.

  천장으로 물이 쏟아졌다.

 

  그녀와 나의 발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나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혼자였다.

 

  달이 떠 있고, 달려온 소녀가 있었다.

 

  그날 밤, 내 방으로 들어온 소녀.

  소녀는 갈 곳이 없었나 보다. 숨을 곳이 없었나 보다.

  내가 안산에 살 때였다. 20대 후반에 나는 안산 월피동에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동화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했다. 소녀는 내가 글을 가르치던 아이, 열 살.

  소녀는 내 방으로 숨어들 듯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말이 없었다. 잠시 뒤 할머니가 찾아왔다. 소녀와 단둘이 살고 있던 할머니였다. 나는 소녀를 방안에 두고 문을 닫은 뒤 할머니와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먼저 소녀가 아주 고집스럽다고 했다. 나는 똑똑하고 글을 잘 쓰는 아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소녀 사이엔 다툼이 있었고, 소녀가 무턱대고 달아난 상황이었다. 할머니는 손녀를 혼자 키우는 이야기를 했다. 소녀를 떠난 엄마와 소녀에게 오지 않는 아빠 이야기. 그리고 백내장 이야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방에서 소녀를 내보냈다. 소녀의 눈물을 조금 닦아준 뒤였다. 할머니는 돌아가며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소녀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나?

  나는 그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회했다. 그 소녀를 하룻밤 데리고 잘걸. 소녀의 이야기를 한참 들어줄걸. 갈 데가 없어서 온 소녀인데, 어쩌면 엄마 대신 나를 찾아서 온 소녀인데.

  이후로 소녀는 나를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얼마 있다가 안산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나는 우연히 골목에서 소녀와 마주쳤다. 내 손엔 짐을 쌀 종이상자들이 들려 있었다.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놀란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녀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달려갔다. 곧 할머니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이쪽으로 갔어요." 나는 급하게 말했다. 그게 다였다. 할머니 뒤를 따라 한 사내가 달려왔지만, 나는 그게 다였다.

 

  소녀를 닮지 않은 사내 얼굴. 소녀를 닮지 않은 할머니 얼굴. 소녀를 닮지 않은…… 내 얼굴. 어느 악몽의 풍경이었다.

 

  그때 소녀는 맨발이었나? 나는 왜 소녀를 놓쳤나? 나는 왜 그곳에서 급하게 방을 뺐나? 소녀는 어디로 갔나?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예민하지 못했나!

 

  떠나 와서야 나는 상자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종이책을 발견했다. 소녀가 직접 글을 쓰고 실로 묶어서 만든 동화책. 연필로 쓴 글씨가 점점 희미해지던 어떤 동화!

 

  한때 소녀와 나는 같은 꿈을 꾸었다. 우리는 "나도!" 하며 동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나는 예민하지 못했다. 소녀의 꿈에 대해서. 우리의 꿈에 대해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나는 소녀를 상상했다. 중학생이 되었을까. 나는 첫 시집을 냈다.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을까.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집을 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뭔가를 하고 있을까. 나는 네 번째 시집을 냈다. 소녀는 동화 작가가 되기 위해 그쪽으로 가고 있지 않을까. 순수한 소녀는 시에 먼저 빠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쪽으로 가고 있지 않을까.

  그쪽.

  그쪽이란 곳은 내가 있는 곳인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곳인가.

 

  나는 상자 속에 작은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 아주 작은 책, 내가 무심한 사이 점점 희미해지는 책, 꿈에 대한 책.

 

  세상에서 가장 희미한 책.

 

  쓴 문장은 보이지 않고

  꿈꾸는 문장만 보이는,

 

  읽은 문장은 사라지고

  꿈꾸는 문장만 나타나는,

    -전문/ p.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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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영배 시인의 사물이야기『물사물 생활자』에서/ 2019. 5. 30. <발견> 펴냄

  * 신영배/ 2001년『포에지』로 등단, 시집『기억이동장치』『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