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을 만들다 외 5편
신현정(1948-2009, 61세)
눈과 코를 만들고
코 밑에 생솔가지를 붙여
그럴듯하게 수염을 만들어주고는
적어도 눈사람은 무슨 소리가 뒤에서 나도
서 있는 그대로 앞만 바라보게 했다
세상을 모나지 않게 둥글게 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생각하면 뒤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앞만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밤에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그것을 눈사람에게 시켰는가 말이다.
-전문(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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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
꽃에도 주먹이 있나니 한 때를 살고 망가지는 것들은 주먹을 가지고 있나니 주먹이 있기 때문에 서럽고 뜨겁고 망가진다고 말할 수 있나니 오늘 두어 송이 망가지는 주먹이여, 허공에 가만히 들이밀고 가장 고요한 주먹이여, 고요히 망가지는 주먹이여.
-전문(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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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내리는 비
그대여 무일푼의 비를 맞고 있다네.
무일푼의 비는 무일푼으로 맞아야 한다네.
무일푼은 한 푼도 없는 것이라네.
무일푼은 일 푼이 될 수 없다네.
그대여 무일푼의 비 내린다네.
무일푼은 무일푼과 합쳐서 일 푼이 되지 않는다네.
일 푼은 소란스러운 것이라네.
무일푼으로 무일푼의 비를 맞아야 한다네.
그대여 무일푼으로 무일푼의 비를 맞고 있다네.
-전문(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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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널면서
줄 길게 해서 바지랑대 세우고
수도가에서 퍼질러 앉아 빨래하다
그렇지 바지랑대만은 내 사는 곳 어디든지
혹 하늘로 가더라도 어깨에 올려 메고 갈 것인즉
거기서도 긴 줄 해서 제비 앉게 하고
잠자리 앉게 하고
어머나 벌써 하나님도 앉아 계시나
빨래 비틀어 짜서는 양손에 들고 탈탈 털어서는
바지든 런닝구든 아래가 위가 되게 거꾸로 매달리게 하는 것도
별난 취미이다
금강金剛처럼 바싹 마르고 또 펄럭이기까지 하여라
흔들고 밟고 북북 문지르며 닦달을 낸 게 언제인데
빨래 널고는
금세 빨래에게 말 걸고 싶어지니.
-전문(p. 12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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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루비아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사루비아에게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유난히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전문(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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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란抱卵
어미 닭은 잘 아는 것이다
알을 얼마만큼이나 품어야 하는 것인지
또 알을 살그머니 굴리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숨이 붙고 눈이 생기고 별 같은 입이 나오고
나뭇잎 같은 날개가 돋도록
알을 굴리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껍데기를 쪼아대는 소릴 들을 때도 되었는데
어미 닭은 잘 아는 것이다
울타리 한 켠에서 개나리가 언제쯤이면 핀다는 것을
이 알들 깨어나면 이 애들 데리고
개나리 환히 꽃 핀 속으로 소풍 갈 날짜도 굴리어 보는 것이다.
-전문(p. 140-141)
발문> 한 문장: 2009년 작고 후 그의 유고시집을 내기 위해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지만 거절당한 기억이 있다. 마지막에 『세계사』에서 시집을 내주어 간신히 빛을 보게 되었다. 『화창한 날』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2010년 1주기 행사를 출판문화회관에서 가졌고, 많은 시인들이 참석하여 그를 추모하였다. 어느덧 10년 너머 저쪽의 일이 되었다. 이번에 펴내는 시선집은 신현정 시인의 지음知音 윤석산 시인의 기획과 <도서출판 도훈> 이도훈 시인의 선한 뜻, 부인 이정휘 여사의 도움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p. 158)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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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정 시선집 『빨간 우체통 앞에서』/ 2024. 1. 30. <도훈> 펴냄
* 신현정/ 1948년 서울 출생,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립對立』(1983), 『염소와 풀밭』(2003),『자전거 도둑』 (2005),『바보사막』(2008),『난쟁이와 저녁식사를』(2009), 유고시집『화창한 날』(2010),
* 서라벌문학상(2003), 한국시문학상(2004), 한국시인협회상(2006), 2009년 10월 지병으로 타계(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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