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김수영(1921-1968, 47세)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전문-
▶'文質彬彬' 또는 '백비白賁'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사랑」은 짧은 마디와 작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김수영적 사유의 특이점을 표상하는 "대극對極"과 "양극의 긴장"이 은은한 날빛으로 정제되어 수려한 이미지로 아름답게 채색된 시이다. 더불어 우리 모두의 "사랑", 그 근저에 도사린 불안과 두려운 낯섦을 빠른 리듬감으로 응축된 반복 어구의 탄력과 파장으로 상기시키는, 김수영의 걸작 중의 걸작이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 "어둠"과 "불빛"은 텍스트 전체가 형성하는 이미지 짜임새을 꼴 짓는 핵심 형상들이지만, 그것에 실질적인 역동성을 부여하는 힘은 "변치 않는"과 "찰나" 사이에 깃든 "대극"의 현란한 엇갈림과 팽팽한 긴장감에 있다.
*
김수영의 「사랑」을 구성하는 이미지의 역동적 움직임은 앞서 살핀 주희의 문장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체험의 질과 바탕을 충실하게 거느린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너의 얼굴"이 "찰나", "불안", "번개"라는 순간과 단절을 의미하는 이미지들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섬세하게 살피면, 그것은 "인仁"의 실제적인 발현 양상仁之用으로서 "사랑"의 가변적인 속성을 빗대어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3연에 나타난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이라는 구절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나날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소음과 갈등으로 가득 찬 "사랑"으로 해석되는 것이 적확할 듯 보인다. (p. 시 222/ 론 223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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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3-겨울(31)호 <criticism> 에서
* 이찬/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비평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감응의 빛살』『사건들의 예지』, 문화비평집『신성한 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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