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김미연_실존의 현장과 그 너머 사랑의 광야(발췌)/ 카타콤베 -6.25에게 : 고정희

검지 정숙자 2024. 1. 17. 23:48

 

    카타콤베     6.25에게

 

     고정희(1948~1991, 43세)

 

  

  아버지 호적에 그어진 붉은 줄

  30년 잠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붉은 줄 무덤 안에 있었다

  가없게도 공허한 아버지의 눈

  삼십 지층마다 눈물을 뿌리며

  반항의 이빨로 붉은 줄 물어뜯으며

  무덤 밖을 날고 싶은 나의 영혼은

  캄캄한 벽 안에 촉수를 박고

  단절의 실꾸리를 친친 감았다

 

  살아남기 위하여 

  맹렬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단 한 번 극복을 알기 위하여

  삭발의 앙심으로 푸른 삽 곧추세워

  무덤 안, 잡풀들의 뿌리를 찍었다.

  맨살처럼 보드라운 잔정이 끊기고

  잔정 끊긴 뒤 아픔도 끊겨

  법 무서운 줄 모르는 욕망을 내리칠 때

  눈물보다 질긴 피바다로 흘러 흘러

  너 올 수 없는 곳에 나는 닿아 있었다

 

  너 모르는 곳에 정신을 가둬두고

  동서로 휘두르는 칼춤 아래서

  우수수 떠나가는 사내들의 뒷모습.

  참으로 외로워 고요히 웃는 밤이며

  굴헝보다 깊은 나의 두 눈은

  수십 질 굳은 진흙에 붙박여

  끝끝내 가능의 삽질 소릴 울었다

 

  삽은 또 하나의 무덤을 뚫고

  다시 또 하나의 무덤을 찌르면서

  최후의 출구를 일격 겨냥했다

  한 치의 햇빛도 허용하지 않은 채 때로

  별처럼 눈을 빛내며 아아

  필사의 두 팔에 휘감긴 나의 날렵한

  삽은 한껏 북받치는 예감에 떨며

  무덤 속 깊이 깊이 벽을 찍어내렸다

 

  나는 서서히 듣고 있었다

  무덤 밖 웅웅대는 들까마귀 울음도

  독수리 떼 너의 심장 갉아먹는 소리도

  이제는 먼 지하 밀림 속

  뿌리 죽은 것들 맑게맑게 걸러져

  한 줄기 수맥으로 길 뻗는 소리

      -전문-

 

  실존의 현장과 그 너머 사랑의 광야(발췌) _김미연/ 시인 · 문학평론가

 정희 시인은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1991년 6월 지리산 계곡에서 물에 휩쓸려 운명했다. 중고등학교는 검정을 거쳤고 한신대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여러 자료에서 그녀는 페미니즘, 여성문화운동, 기독교 상상력, 여성해방의식, 민중의 아픔 등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집은 10권이 있는데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97),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여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등이 그것이다.

 

      *

  초기 그리스도인의 지하묘지 카타콤(catacombs)은 라틴어 '가운데'와 '무덤들'의 합성어이다.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지하묘는 로마제국의 박해기에는 피신처 역할을 하기도 한 곳이다. 고정희의 시 「카타콤베」는 그 카타콤을 가리키는 말이다.

  1세기부터, 개종한 유태인으로 간주되었던 기독교도들은 종종 로마 영토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매장되었다. 바위를 대충 다듬어 만든 무덤으로 이는 팔레스타인의 바위 무덤을 연상시켰다. 죽은 이를 성벽 안에 묻는 것은 로마의 법에 어긋났으므로 이러한 묘지는 성벽 외부에 있었다. 성 베드로가 바티칸 언덕에 있는 커다란 공동묘지에 묻혔고 성 바울이 '오스티엔세 길'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힌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

  카타콤은 로마 여행이나 터키여행 등을 한 사람에게는 여정에 카타콤이 빠지지 않는다. 지하무덤이고 박해를 피해 그곳이 생명을 살리는 은신처이기도 했다. 고정희의 카타콤은 6·25가 남겨준 이데올로기 대치상황과 그 부작용의 여파를 형상화한 시다. 화자는 아버지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져서 아버지의 사상에 의해 연좌제라는 멍에를 뒤집어쓰고 사는 사람의 삶을 그린다. 카타콤베는 약자들의 은신처이다. 고정희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붉은 줄에 걸려 지하묘지에 갇혀 살았던 처지와 다를 바가 없다. 사회가 정한 규정과 억압에 눌려 일생 감시 속에서 지내야 했을 것이다. 어두운 지하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심정을 토로한 카타콤베는 6·25 전쟁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제도로 자식이 공직 근무를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지금은 그 연좌제가 없어졌다. 이 제도가 있을 때 화자는 살아남기 위해 맹렬한 싸움을 걸었다. (p. 시 133-135/ 론 126 * 132-133 *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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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현대 시인 열전- 27/ 임영조 편> 에서

  * 고정희(1948~1991, 43세)/ 전남 해남 출생, 1991년 지리산 계곡에서 물에 휩쓸려 운명, 1975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초혼제』『이 시대의 아벨』『눈물꽃』『지리산의 봄』『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여성해방출사표』『광주의 눈물비』『아름다운 사람 하나』, 유고시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등

  * 김미연/ 2010년『시문학』으로 시, 2015년『월간문학』으로 문학평론 2018년『월간문학』으로 시조 부문 등단, 시집『절반의 목요일』『지금도 그 이름은 저녁』 평론집『문효치 시의 이미지와 서정의 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