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일없다 외 2편/ 오탁번

검지 정숙자 2024. 2. 20. 02:17

 

    일없다 외 2편

 

    오탁번(1943-2023, 80세)

 

 

  애련리 한치마을

  큰 느티나무 앞 폐교에는

  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고

  새소리만 들리는 적막뿐이었다

  오석烏石에 새긴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가

  번개치듯 내 눈에 들어왔다

  교실 세 칸에 작은 사택

  다 주저앉은 숙직실과

  좁은 운동장이

  옛동무처럼 낯익었다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을 살려

  '원서헌'遠西軒이라 이름짓고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을 잔다

  먼 서녘, 원서는

  종말이 아니라

  새날의 시초라고

  굳이 믿으면서

  스무 해 되도록

  이러구러 살고 있다

 

  서울 친구들은

  낙향해서 괜히 고생하는 내가

  좀 그래 보이겠지만

  수도가 터지고

  난방이 잘 안 돼도 일없다

  두더지가 잔디밭을 들쑤셔도

  사람보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자주 와도

  다 일없다

   -전문(p. 19-20/ 『예술원보』66호(대한민국예술원, 202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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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삭임 1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고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

      2023. 01. 05. (전문, p.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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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삭임 3

 

 

  아무렴, 1만분의 1 가능성은 있다

  서울 큰 병원 의사가 말할지도······

    암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아뢴다

    꿈 깨시와요!

 

  오냐 오냐

  오래 살았는데, 뭘

  죽음아

  어서 온나

  썅! 내가 한턱 쏘마!

      2023. 01. 05. (전문, p. 81-82)

  

 

 발문> 한 문장: 이 유고 시집은 오탁번 선생이 지난 2023년 2월 14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 당신 손으로 직접 정리한 것이다. 그의 유족에 의하면 선생은 병이 온몸으로 퍼져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인지한 2월 초부터 거처인 제천의 원서헌에서 이 시집을 엮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의 배치와 각각의 장에 붙은 제목, 그리고 '속삭임'이란 시집 제목 모두 선생이 직접 쓴 것이다. 작품마다 끝에 게재지와 창작 일자도 적어 놓았다. 선생은 작품을 송고하고 아직 책이 발간되지 않은 상태의 것도 이곳에 적어 놓았다. 게재지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은 발표나 송고하지 않은 작품이다. 선생은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문학적 삶을 스스로 완벽히 정리해 놓은 것이다.

 

      *

  (「속삭임 1」, 「속삭임 3」은) 암이 온몸에 퍼진 걸 처음 인지하고 돌아와서 쓴 시이다. 건강하게 지내다 갑자기 닥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그 놀랍고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시인은 이 상황을 이렇게 유머로 승화하여 시로 적고 있다. 이 시에는 평소 선생의 순박한 말투도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선생이 기록해 놓은 날짜에 의하면 그는 이날 세 편의 시를 썼는데 모두 이 시와 유사한 유머가 구사되어 있고, 시 「속삭임 3」에는 자기에게 찾아온 죽음에게 한턱 쏘겠다는 호기가 드러나 있기도 하다. 선생은 한 달 남짓에 이른 갑작스러운 죽음과의 대면 기간에 아홉 편의 시를 썼다. 그는 이 연작시에서 병원에서의 진찰과 검사 과정,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진단명 등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적고 있다. 선생의 그 리얼한 병상 일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며,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시편마다 박혀 있는 유머러스하고 오연한 시구를 대하며 우리는 선생의 그 가늠할 길 없는 정신의 높이에 한없이 숙연해진다. 선생은 죽음 앞에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를 쓰다 세상을 하직하였다. 선생이 죽음을 앞에 두고 정리하였던 이 시집을 일주기에 맞춰 발간한다. 생전의 선생의 '속삭임'이 시집 곳곳에서 들려온다. (p. 91 * 95~96) <고형진/ 문학평론가 ·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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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탁번 유시집 『속삭임』에서/ 2024. 2. 14. <서정시학> 펴냄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백운초, 원주중·고,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졸업.

  * 1966년⟪중앙일보⟫(동화) & 1967년⟪중앙일보⟫(시) & 1969년⟪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 당선, 시집『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 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오탁번시전집』『손님』『우리 동네』『시집 보내다』『알요강』『비백』.

  *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문학상 특별상 수상, 은관문화훈장(2010) 수훈. 

  *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2023년 2월 14일 병환으로 타계(삼가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