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이숭원_불확정의 우주로 유영하는 산문시(발췌)/ 까마귀의 밤 : 서대경

검지 정숙자 2024. 2. 24. 01:51

 

    까마귀의 밤

 

     서대경

 

 

  헌책방 구석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작은 책상에 코를 박고 잠들어 있던 백발의 노인이 퍼뜩 깨어나 고개를 들어올린다. 문 닫을 시간이야. 노인의 왼쪽 눈이 소리친다. 벌써 어두워졌군. 노인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중얼거린다. 문 닫을 시간이라고. 알아. 노인이 대답한다. 노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침침한 조명 아래,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책장들 사이로 난 비좁은 통로를 걸어간다. 영업시간이 끝났으니 내일 다시 오시오! 노인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친다.

 

  노인은 산발한 머리를 갸우뚱하며 오른쪽 눈이 깨어나길 기다린다. 일어나, 게으름뱅이야! 노인은 잔나비가 춤을 추듯 몸을 앞뒤로 건들거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책상 위에 놓인 원고 뭉치를 내려다본다. 노인은 원고를 집어 든다. 밤길 걷는 사람. 노인이 제목을 중얼거린다. 누가 쓴 거지? 네가 썼잖아. 왼쪽 눈이 말한다.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가 잤다고? 그럼 누가 가게에 불을 켰지? 노인은 원고를 들고서 창가로 다가간다. 말해봐, 내가 지금도 자고 있어? 노인이 왼쪽 눈에게 묻는다. 오른쪽 눈이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바라본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속으로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다.

 

  지금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알 수가 없군. 가게 안엔 언제나 아무도 없고, 창밖에선 언제나 눈이 내리고 있으니 말이야. 지금이 오늘일까? 어제일까? 지금은 언제나 오늘이지, 이 노망난 늙은이야. 왼쪽 눈이 말한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노인이 오른쪽 눈에게 묻는다. 오른쪽 눈은 말이 없다. 노인은 오른쪽 눈을 몇 번 꿈쩍거려본다. 노인은 실내의 조명을 끈다. 간판 불을 켜두었던가? 문 앞에 서서 노인은 문을 열고 나가볼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왼쪽 눈이 서서히 내려오는 노인의 눈꺼풀 뒤에서 까마귀처럼 선회한다. 오른쪽 눈이 꿈의 안개 속에서 검게 웅크린다. 먼지 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노인의 구부정한 어깨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눈발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흠칫 몸을 떨며 노인이 깨어난다. 집에 가야지. 노인은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서류가방에 원고를 쑤셔 넣고 검은 모자를 머리에 쓴다. 노인의 의자에 몸을 기댄다. 노인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귀 기울인다. 내 집이 어디지? 노인이 왼쪽 눈에게 묻는다. 왼쪽 눈이 메마른 웃음을 터뜨린다. 노인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오른쪽 눈이 눈꺼풀 틈으로 창밖의 불빛을 응시한다.

    - 『굴뚝의 기사』(현대문학 PIN, 2023), 전문

 

  ▶불확정의 우주로 유영하는 산문시    서대경의 시(발췌) _이숭원/ 문학평론가

  대경의 두 번째 시집 『굴뚝의 기사』는 산문시가 주류主流다. 산문시의 비중은 첫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보다 더 커졌다. 그의 산문시는 대부분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고, 주제는 존재 탐구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나'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위상과 의미를 탐사하는 데 기운이 집중된다.

 

    *

  문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산문시가 있고, 스토리를 중심으로 한 산문시가 있다. 서대경의 산문시는 후자 쪽이다. 그의 시는 스토리텔링에 중점이 놓인다. 소설과 다른 점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유령에 가까운 불확정성, 모호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의 산문시는 서사의 상징성이 서사의 스토리텔링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첫 시집에서 의미 있게 등장한 요나의 이미지가 두 번째 시집에서 확대되고 증폭되는데, 이것은 첫 시집에 암시적으로 등장한 '굴뚝에서 사는 사내'가 두 번째 시집에서 '굴뚝의 기사'로 확대되어 몇 편 시의 표제로 증폭된 것과 대응된다.

  약성서에 등장하는 '요나' 자체가 명확한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미지의 인물이다. 선지자 요나는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배를 타고 도망하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져 큰 물고기 배 안에 들어갔다가 3일 후에 살아나 하느님의 명을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불만을 품어서 다시 하느님의 교화를 받는 묘한 인물이다. 요나는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것일까? 이 일화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런 해석을 떠나 요나의 서사는 인물과 의미의 불확정성이라는 특징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천상의 비밀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듯하다. 서대경 시인에게 이 점이 요나 수용의 유인책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원숭이라는 명명보다는 요나라는 이름이 호명의 우아함도 지니고 있어서 시적인 울림을 준다. 그의 시에서 말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원숭이로, 요나로, 굴뚝의 기사로 분화된다. (p. 시 102-103/ 론 109 *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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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 계간 『상징학 연구소』 2024-봄(13)호 <시집 2023 클래식/ 평론> 에서

  * 서대경/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백치는 대기를 느낀다』『굴뚝의 기사』

  * 이숭원/ 1986년『한국문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서정시의 힘과 아름다움』『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초록의 시학을 위하여』『폐허 속의 축복』『감성의 파문』『세속의 성전』『백석을 만나다』『시 속으로』『미당과의  만남』『김종삼의 시를 찾아서』『목월과의 만남』『몰입의 잔상』『구도 시인 구상 평전』『탐미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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