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온통 비라서/ 강재남

검지 정숙자 2024. 2. 23. 02:36

<Pakistan: Sindh Courier 2023. 9. 8.>

 

    온통 비라서

 

     강재남

 

 

  어쩌다 이렇게 만났을까요 부질없는 것은 늘 부질없는 것이 되버려요 너를 가늠하는 밤엔 꽃나무가 생겨났죠

 

  흩어지다가 모양을 바꾸다가

  사라진 후 묵념하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꽃나무가 울어요

  질긴 질감을 가진 울음이 지나면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생각해요

  잠시 왔다 간다거나 꽃나무를 떡갈나무로 부른다거나

  조금씩 넓어지는 우산이 되어

 

  어둠에 누워 흘러간 생을 만져요

 

  이런 일이 너의 속성이라면 그날 복화술사의 휘파람은 온통 네 것이었겠군요 어둠은 민낯으로 세상을 살았고요 너는 촘촘한 이야기를 남겼겠어요

 

  오래 참아서 낡아버린 마음과 누대를 거쳐 허물어지는 마음과 끝까지 가보지 못한 마음과 부지런히 잊어야 하는 마음

 

  어떤 곳에도 머물지 못하는 마음이 최선을 다해 투명해져요 뜨거운 너는 내가 되기도 하죠 우리는 같은 통증을 앓으므로 어느 해 꽃으로 피어도 괜찮을 거예요

 

  비로소 편해졌나요

 

  너는 경쾌한 얼굴을 해요 함부로 절망하지 않은 모습으로

  빗방울은 창문에 부딪히며 낯선 지도를 그리고

  가장자리부터 밝아오는 꽃나무

 

  친절한 나무는 그냥 웃어요 펼친 잎이 착한 꿈으로 쌓여요

  그리하여 우리의 뒷모습이 완성되지 않는다 해도

 

  완결된 서사가 죽음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없던 것으로 해요

  너의 세계가 이런 거여서

  꺼내기 어려운 마음을 한꺼번에 쏟아버리는 거여서

 

  먹구름이 천천히 지나요 비의 문맥은 가파르고 기울어지고

  도라지꽃 같고 느닷없고

  무연과 무해가 끝없이 생기는 거기

 

  너의 기분이 흘러나와 생을 적셔요 오늘은 멀고 내일은 가벼운 곳에서

  한 세계가 멸망해요

  혼자의 형식을 갖는 곡예사처럼 가만히

    -전문(p. 64-65)

 

   * 블로그: 외국 지면에 소개된 대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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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 계간 『상징학 연구소』 2024-봄(13)호 <지구촌 시단> 에서 

  * 강재남/ 2010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이상하고 아름다운』『아무도모르게 그늘이 자랐다』

  * 강병철/ 번역 및 해외 소개(시인 ·소설가 · 번역가)